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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박사께 드리는 반론글 3조덕영박사께서 가장 오해하고 있는 신학적 오류가 전달자의 관점 이해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로목사께서 십자가의 완전한 속죄를 부인하고 부활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을 구원론의 관점&

조덕영박사께 드리는 반론글 3

조덕영박사께서 필자에 대해 무례하고 수준 낮은 글이라고 바른믿음 사이트를 통해 공개적으로 게시하여 필자는 개인 이메일을 통해  조덕영 박사와 신학적 토론을 요구하였고 필자의 태도가 왜 무례하고 수준 낮은 글인지에 대한 반론을 요청하였습니다. 필자는 조덕영박사와 개인적으로 나눈 신학적 토론을 독자들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약간의 수정한 내용들을 공개합니다.

조박사께서 바른믿음 사이트를 통해 ‘이재위 목사의 글은 국내 <목회와 진리수호>와 <무물> 카페에 실려 필자의 글을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수준 이하의 글에 필자는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김성로 목사 두둔 말고 그 이대위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미 남침례교의 수준인가?’ 라고 주장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이메일을 통해 필자에게 “무물카페와 진리수호 등 이재위 목사의 수준 이하의 김성로 대변글과 본인에 대한 악의적으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 글들에 대해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종교개혁신학에 그만 도전하고 우기지 말고” 라고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바른믿음 목회자들의 글의 특징은 객관적인 근거를 두지 않고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견해로 글을 쓴다는 것입니다. 먼저 필자가 조박사의 글을 어떤 근거로 악의적으로 애곡하고 있는지, 필자의 논평이 왜 수준 이하의 글인지 그리고 종교개혁신학에 무엇을 도전하고 있는지 필자가 제기한 반론을 근거로 재 반론 하기를 바랍니다.

먼저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복음은 김성로목사께서 새롭게 발견한 이론이 아니라 현대 신학자인 판넨베르크 교수나 남침례교 조직신학자 그렌츠교수 그리고 많은 전통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또 초대교회가 세워진 근간이며 사도들이 생명걸고 전한 복음입니다. 한국교회가 부활의 가치를 강조하지 못했다는 현실에 대해 서철원박사께서도 인정하신 사실이며, 박형룡박사도 김성로목사를 통해 부활의 가치가 강조되고 있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른믿음 측 목사들과 조덕영박사께서 김성로목사님이 주장하는 역사적 부활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심히 유감을 표합니다.

정이철목사의 자기 도취적인 성경해석과 왜곡 편집으로 약 일년 동안 한 교회 목회자를 사악한 이단으로 매도하고 정이철목사가 비평한 자료만을 의지하여 조박사를 비롯한 몇 명의 목회자들이 설교 문맥 무시하고 말꼬리를 잡아 상대방의 설교를 왜곡편집을 통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부활교 이단,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른 목회자와 신학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개인적 관계가 전혀 없는 김성로목사의 신학을 대변하는 이유는 김목사의 설교와 칼럼 등을 분석해 본 결과 몇 가지 적절치 못한 신학적 표현은 있었지만 설교자의 전후 문맥을 볼 때 설교자가 전하려고 하는 내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며 정이철목사의 왜곡 억지 주장이라고 판단했고 정목사의 비인격적이며 공격적인 주장들은 목회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의적이고 왜곡된 주장을 통해 한 교회 목사를 사악한 이단이라고 매도하는데 정상적인 목사라면 당연히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박사님 입장에서는 김성로목사의 신학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필자의 태도에 대해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김성로목사의 부활복음의 심각한 문제성을 지적한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주장을 관찰한 결과 비평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일차자료를 무시하고 전달자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한 자의적인 비평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박사님의 논평의 문제점은 

첫째, 객관성 결여 

둘째, 왜곡된 비평을 통해 일차자료를 무시한 논평자세 

셋째, 조직신학자의 무책임한 성경 해석 

넷째, 부활에 대한 개념의 편협적인 이해 

다섯째, 설교자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한 자의적 비평 등입니다. 

참고로 논평에 있어 가장 기본은 설교자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학 특징상 다양한 기능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필자는 신앙의 선배들이 지켜온 종교개혁 신학의 기틀이 되는 초대교회 사도들이 생명걸고 전한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복음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박사께서 필자에게 읽어 보라고 제시한 스탠리 그랜츠의 교수의 부활론을 이해하려면 독일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랜츠교수는 1978년 독일 뮌헨대학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지도하에 논문을 썼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역사적 예수의 숙명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하여 규정되며 역사적 부활을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즉 판넨베르크 교수는 기독론을 증명하는데 예수의 역사적 부활사건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고 조박사께서 읽어 보라고 조언해 주신 그랜츠교수의 부활론에 큰 영향을 미친 교수가 판넨베르크교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필자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에 대해 전부를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시신학적 접근을 정통주의자에게서 기독교 교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지만 보편사적인 접근을 통해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역사성을 기초로 이성을 통한 합리적인 추론을 통한 접근방식과 전통적인 신학자들이 부활의 개념을 신자의 종말론적 부활과 소망의 관점이었다면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기독론을 증거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계시를 부활의 역사성과 보편성을 통해 증명하려고 한 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입니다. 필자는 역사성을 기반으로 이성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추론에 있어 동의하고 있으며 특히 역사적 부활사건을 통해 기독론을 증명하려고 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의 믿음에 있어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조덕영박사께서 가장 오해하고 있는 신학적 오류가 전달자의 관점 이해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로목사께서 십자가의 완전한 속죄를 부인하고 부활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을 구원론의 관점이 아닌 기독교의 근간이며 특히 구원론의 초석이 되는 기독론을 역사적 부활사건을 통해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마음교회는 예수의 주와 그리스도, 하나님 되심의 신앙고백 즉 기독론을 부활사건을 통해 확증하고 이 반석 위에 십자가의 속죄,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음으로 확증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들의 공통점은 동일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으로 확증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 믿음을 통해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자신의 삶의 변화와 삶의 본질적인 목적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가져온 새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 순종에 의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가장 근본이며 시작이 기독론이며 판넨베르크와 그랜츠교수의 주장처럼 역사적 부활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정체성 즉 기독론을 여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그래서 김성로목사는 역사적 부활사건을 기독론관점에서 기독교의 심장이며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이해에 있어서 토대가 되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언은 모든 사도적 설교의 중심이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삶 속에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초기 신자들의 주장을 위한 일차적인 변증의 역할을 계속적으로 해왔던 한 사건이었다.” (스탠리 그랜츠교수)


스탠리 그렌즈는 ‘신약성서의 기자들에 의하면, 십자가는 부활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있는 계시가 아니다. 성금요일의 십자가는 부활절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십자가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 십자가를 새로운 날의 빛으로 가져온다. (스탠리 그렌즈 조직신학 발췌)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신학이란 두 가지 축을 가진다. 하나는 보편사라는 축(軸)이다. 이 축에서 신학은 인간 사상 전체 안에 그 지평을 갖는다. 역사적 이성에 상응하는 축이다. 또 하나는 교회라는 축이다. 즉 신앙에 상응하는 축이다. 신학은 교회라는 동질적인 공동체,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명백하고 의도적인 신앙고백을 하면서 사는 신앙공동체 안에 그 지평을 갖는다.라고 주장합니다.

신학과 목회는 동전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현대 교회 맹점이 신학과 목회가 현실적인 목회 현장에서는 경험과 현실 상황에 접목하다 보니 신학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신비주의, 기복주의, 종교통합주의, 신사도운동 등이 득세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김성로목사의 목회를 검증하면서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는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는 보편사라는 축과 명확하고 의도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즉 한마음교회는 초대교회 사도들과 또 현대 신학자인 판넨베르크와 그랜츠교수가 주장하는 역사적 부활사건을 근거로 정확한 기독론의 고백을 통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한마음교회 공동체의 공통적인 믿음의 고백이 역사적 부활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었다고 간증합니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는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단순히 학문적 주장이 아닌 목회에 실제가 된 사례이며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서철원박사, 정이철, 이창모, 전태, 조덕영목사의 논평의 공통적인 오류가 김성로목사가 강조하는 부활의 개념을 전달자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속죄론적 관점의 구원론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착각하여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필자는 신학적 토론을 통해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바른믿음 목회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반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로 제대로 정독하지 않고 무시하는 겸손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으며, 이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참고로 필자는 서철원박사, 정이철, 이창모, 조덕영목사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제기 했지만 어느 누구도 설득력있는 반론을 제시하지 않았고 여전히 정이철목사와 바른믿음 목회자들께서는 자신들의 왜곡 편집된 내용을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조덕영박사 주장

 (1) 포도원을 허는 미숙한 김성로 신학의 문제점: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도 ‘이오타’ 하나 가지고 치열한 기독론 싸움을 하였음. 부활복음은 바로 그런 미숙함에서 발생한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기에 김성로 목사는 이단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수시로 수정하는 것이다. 즉 이것이 미숙한 신학의 특징이다.

 

이재위목사 반론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이오타’ 하나로 치열한 기독론을 싸웠지만 현대교회는 선배신학자들의 노력의 결과로 신학이 체계화되었고 전통신학과 이단의 신학적 경계가 분명해 졌다. 그런데 현대 교회의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신학과 목회가 접목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김성로목사의 문제가 있었던 일부 주장은 지엽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성로목사가 수정하는 것은 원론적인 신학을 수정한 것이 아니라 오해의 소지가 있고 적절하지 못한 신학적 표현을 수정한 것이다. 이 부분을 정이철목사와 그 외 목회자들이 설교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의적 해석을 통해 이중제사, 십자가훼파, 부활구원론 등의 용어를 바른믿음 측에서 창작하여 문제를 왜곡 편집하여 부풀린 것이다. 김성로목사가 타 이단연구단체의 권면을 겸손히 듣고 수정한 점은 미숙한 자가 아니라 겸손한 목회자라고 생각하며 개혁신학의 기본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조덕영 박사 주장

(2) 부활구원론의 치명적 문제, 유아구원문제(아주 중요한 문제):

부활의 중요성을 모르는 그리스도인과 신학자들이 어디 있나. 그런데 왜 김성로 목사처럼 이상한 부활복음을 창시하지 않았을까? 바로 유아구원문제이다! 부활을 모르는 유아들에 대해 부활복음은 유아 구원 문제를 답할 수 없다! 유아는 부활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다.

 

이재위목사 반론

필자도 인간의 완전한 속죄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임을 믿는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기능적인 관점에서 역할이 다르다. 부활의 중요성을 알면서 한국 교회는 부활을 강조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김성로목사는 이상한 부활복음을 창시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사도들이 생명걸고 전한 부활의 사건을 통한 기독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론에서 유아구원문제가 제기되는 것에 대해 필자는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유아 구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유아구원문제는 현재도 많은 신학자들의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필자가 믿는 유아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다고 믿고 유아들은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 혹시나 조박사께서는 인간의 구원의 개념을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구원의 개념을 다시 정리해야 할 것이다. 신학적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개념을 정리하는 것이다.

참고로 기독교의 믿음의 시작은 기독론이다. 스탠리교수는 ‘우리는 예수의 자기 인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인 부활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만 예수께서 유일무이한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오직 부활만이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실존을 위한 모범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 (스탠리 그렌즈 조직신학) 

그렌즈 교수의 주장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받는다. 기독교의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그리고 십자가의 대속의 교리를 믿음으로 확증케하는 부활은 그렌즈교수의 주장처럼 모든 인간의 실존을 위한 모범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구원론에 가장 중요한 믿음의 고백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조덕영박사의 주장처럼 유아구원문제는 부활이 답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면 조박사는 현재 십자가와 부활을 이원화 시키고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는 존재할 수 없다. 사변적인 신학적 토론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3. 조덕영박사 주장

그리스도의 종들이 할 일:

부활이 아니라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히 13:13)가야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십자가 신학이다.

 

이재위목사 반론

조박사의 주장처럼 신자의 성화론적 관점에서 피뭍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는 것에 필자도 동의한다.

하지만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은 성화론적 측면이 아닌 기독론적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다.

조박사께서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에 그에게 어떻게 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 가지 예로 제시해 주길 부탁드린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이해하려면 중세시대 목회자들의 타락한 삶의 배경을 이해 해야 할 것이다.


(4) 조덕영박사 주장

부활 믿음: 목사가 부활조차 그리도 못 믿었단 말인가? 성경은 누구나 부활한다고 말한다.


 

이재위목사 반론: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기능론적 관점에서 부활이 주는 믿음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다. 조박사께서는 여전히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부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참고로 조박사께서 필자에게 제시한 그랜츠교수의 조직신학책 기독론관점에서 본 부활론을 읽어 보기를 권면 드린다.

“신약성서는 초기의 신자들이 부활을 예수 자신 및 그의 사명에 대한 예수의 이해를 하나님께서 확증하신 사건으로 보았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유일무이성에 관한 예수의 주장을 친히 확증하셨다.” (스탠리 그랜츠교수)

(5) 부활보다 더 포괄적인 풍성한 단어들:

부활뿐 아니라 영원한 삶, 영원한 소망, 영원한 하나님 나라, 부활의 산 소망, 영원한 소망 등 풍성한 단어가 참 많다!


 

반론: 

조박사께서 주장하는 부활의 개념은 신자의 종말론적 구원의 관점에서 보는 부활이다. 여전히 김성로목사가 주장하는 기독론적 관점의 부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주장들이다.

 

 

(6) 부활의 심판대 앞에 무엇으로 설 것인가? 부활 구호?:

아니다! 유아들처럼 모든 이들은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인 것이다! 부활구호로 설 수 없다!

반론: 필자가 보내준  논평을 참고하길 바란다.

(7) “하나님의 승부수”?:

승부수는 운동경기에서 실력이 벅찬 선수가 쓰는 카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제 3계명에 어긋날 수 있는 이런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

반론: 비판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승부수라는 개념을 하나님과 마귀의 싸움 구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사랑과 완전한 공의를 완벽하게 이루신 사건은 십자가에서 완전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리고 속량이라는 개념은 마귀에게 값을 주고 산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값을 지불하여 이루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승부수라는 표현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부활은 타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독보적인 사건으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는 최고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타종교 창시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스스로 자신의 말과 또 자신이 누구인가를 증명하는 자증적인 주장이다.” (고든 루이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승리한 줄로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승리하게 하셨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창세 전 부터의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예정이셨다. 하나님의 승부수라는 용어는 곧 부활, 십자가의 승리를 가리키며 그 용어가 잘못이라고 보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지창조보다 더 큰 사건 부활은 인간의 과학 문명이 발전해도 극복할 수 없는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며 죽으심과 부활사건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처럼, 주인되어 살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성자 예수님이 직접 표적이 되어 보여 주신 지상 최고의 사건으로 악하고 음란한 우리의 마음에 자발적 순종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최고의 ‘승부수’라고 생각된다. 조박사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승부수라는 말이 “제 3계명에 어긋날 수 있는 이런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하는 주장은 비약적인 억지 이론에서 나온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결론적으로 조박사께서  ‘계속 김성로를 두둔하는 호위무사 노릇을 한다면 이 글을 다듬어 이재위 목사에게 띄우는 글(답글)로 <바른믿음>이나 제 <홈피나 블로그>(창조신학연구소) 등에 게재하도록 하겠다고 하셨는데 신학적 토론에서 견해가 다르다고 필자에게 ‘호위무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신학자로서 성숙하지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조박사의 논평은 신학적 견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닌, 한 개교회 목사를 부활교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논평이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김성로목사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 됩니다. 참고로 신학적 토론에서 기본적 예의는 상대방의 논평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상대방의 논평을 정독하는 것이 기본적 태도 중에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조박사께서 필자의 재 논평에 대해 ‘이재위 목사 글은 자세히 보지 않았습니다. 논평을 논평한 것을 논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논평은 그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미숙한 논쟁일 뿐이지요.’ 그리고 ‘다만 이재위 목사의 논문이 있다면 필자가 기꺼이 논평자가 돼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바른믿음측 목회자들의 특징이 상대방에 대한 논평에 대한 존중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토론 과정에서 필자의 논평에 대해 무시하고 뜬금없이 필자의 논문이 있다면 논평해 주시겠다는 것은 현 상황에서 적절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생각됩니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필자의 논문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조박사께서 상대방을 부활교 이단이라고 정죄하였고 그에 대해 필자가 문제를 제기했다면 자세히 읽어 보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자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그리고 현재 신학적 토론의 주제는 아직 이단이라고 검증되지 않은 개교회 목사를 부활교 이단이라고 정죄한 조박사의 논평에 대한 토론이라고 생각되는데, 필자의 논평을 읽어보지도 않고 필자에게 신학적으로 권면하는 자세가 바른 신학자의 태도인가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그리고 박사께서는 이런 문제 제기를 염두에 두지 않고 개교회 목사를 부활교 이단이라는 기자 회견에 논평자로 나섰나요? 신학자는 반드시 자신의 주장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사실과 다르다면 이번 논평은 상대측 목사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되는 주장입니다. 상대방의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현대 신학은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하고 있고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목사로서 최고의 수치이며 명예가 손상되는 발언이며 해당 성도들에게 상처가 되는 발언이기 때문에 신중해야 하며 이단이라고 판명할 수 있는 권위는 교단입니다. 아직 교단에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는데 부활교 이단,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자세가 바른 조직신학자, 목회자의 태도인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필자가 바른믿음 목회자들께 권면 드리고 싶은 것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진리인 양 일방적으로 주장하지 마시고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볼 것을 정중히 권면 드립니다. 필자의 견해에 이의가 있다면 인격적인 모독은 하지 마시고 조직 신학자 답게 설득력있는 학술적 근거를 통해 신학적인 견해를 주장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박사님의 설득력있는 답변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17년 2월 1일

애틀랜타 뉴에덴 침례교회 이재위목사 올림

이재위  ksbcameric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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