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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2)무분별한 정죄막고 건강신학 위해 교수들 비평

정이철 목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2004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미시간 주 ‘앤아버 반석장로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고후10:4)을 무너뜨리는 신학신문 <바른믿음>의 대표라고 소개하고 있는 그의 신학사상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제기한 연구 보고서가 나와 화제다. 연구를 진행한 교수는 총신대학교의 일곱 학자들(김성태, 이한후, 김지찬, 정승원, 김창훈, 박용규, 이상원). 한국교회와 예장합동측 총신대학교 사태에 대한 왜곡은 물론, 방언에 관한 몇 개의 신학적 잣대로 다른 사람을 무차별 정죄하는 정 목사의 발언에 대하여 깊은 책임의식을 느껴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학적 성숙을 위한 성찰과 평가가 작성의 이유다. 이 평가서에 대해 독자들이 읽어 바른 판단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한 본지는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에 대한 글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II. 개혁주의 전통의 성령의 이적관(異蹟觀)
 

【 <교회와신앙> 】 우리는 지금까지 박영돈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나타난 정이철의 개혁신학의 왜곡과 방언을 인정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몰아가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전통의 신학자들이 이적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중요한 역사적 기독교 전통, 역사적 개혁주의 노선에 선 어거스틴,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찰스 핫지, 현대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스프라울, 파이퍼 등의 입장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어거스틴의 기적 이해
 

   

▲ 어거스틴이 살았던 당시 도나티스트 파들은 방언을 인정했고
그런 현상이 당시에도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파들의
성령의 역사나 방언의 은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되지 못함을 비판한 것이다.
 

소위 개혁주의 창시자 요한 칼빈의 신학적 멘토였던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편 우리는 기적을 전파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해서는 아니 된다. 비록 실제적으로 본 사람들이 많이 없고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신적인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하기 전에 사람들이 믿기도 했다.”(*Augustine, De Vera Religione 25 (47) as found in Augustine: Earlier Writings.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Trans. by John S. Burleigh. (Philadelphia, Pa.: the Westminster Press. 1953), 248. 어거스틴은 겸손을 최고의 기독교인의 미덕으로 여겼다. 위 인용문 바로 이어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겸손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또한 어떤 인간의 권위도 순전한 영혼의 이성(이해)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분명한 진리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지 않는다. 만약 교만이 없는 곳이라면 이단도 없고 분리주의자도 없고 할례자도 없고 우상숭배자도 없다. 만약 약속하신대로 사람들이 완전하게 되기 전에 서로 반대의 입장들이 없었다면 진리를 매우 열정적으로 찾은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기적을 전파한 사람들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무엇인가? 기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다는 말이 아닌가? 어거스틴은 기적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입장을 전파하는 자들을 의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도 남겼다. “오늘날 세례받는 자에게 안수 할 때 그들은 성령을 받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자들이 지나갈 때 그 그림자로 병이 낫는 일이 그쳤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그 책(De Vera Religione)을 쓸 때 한 맹인이 밀란에서 눈을 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 수도 없고 또한 알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Augustine, Retractiones, in The Edinburgh Magazine and Literary Miscellany. Vol. 15. (Edinburgh: Printed for Archibald Constable and Company. 1824), 688.) 어거스틴은 성령의 놀라운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말씀이 매개되어 성령께서 그 심령에 강하게 역사하신 회심이었다.
 

어거스틴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죽은 신학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과 살아계시는 성령 안에서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당시 도나티스트 파들은 방언을 인정했고 그런 현상이 당시에도 나타났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파들의 성령의 역사나 방언의 은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되지 못함을 비판한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성령은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보편적 교회를 하나되게 하신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7x7=49에 하나 더한 50일째 성령이 임하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엄중한 교훈을 주신다. 즉 하나가 더해진 것은 우리로 하나되게 하라시는 것이다.”(*Augustine, Sermo CCLXVIII (268) Col. 1231.)
 

어거스틴이 도나티스트들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은 이들의 방언 남발과 신비체험 강조 때문이 아니라 교회를 떠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교회를 공격한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핵심, 특히 오순절 방언의 현상은 교회가 하나됨에 있었다고 어거스틴은 강조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역사나 방언을 부정하지 않았다도나티스트를 어거스틴이 정죄한 것은 그들의 재세례와 분리주의 사고였다. 박해를 참고 견딘 것은 참으로 높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이지만 자신들이 준 세례만을 세례로 인정하고, 다른 기성교회를 정죄하는 분리주의 사고를 어거스틴이 경책한 것이다. 사랑의 결여된 것이 도나티스트들의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만약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면 그 세례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관용을 외쳤던 교회 지도자였다.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고 함부로 교회 지도자들을 공격하는 정이철 목사는 어거스틴의 기준에 따르면 이단인 것이다.
 

2.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의 기적 이해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비록 칼빈주의자가 아니지만 건전한 신학자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루터는 비록 로마 천주교와 재세례파의 신비주의를 강하게 공격하였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설교에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설교에 표적이 동반된 것처럼 기적이 동반되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사람은 두 가지 방법 중 한 방법으로 자신이 설교자로 부르심을 얻는다. 첫째는 하나님께 직접 받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들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다. 만약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설교에 기적들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설교에는 표적이 동받되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Martin Luther. Festival Sermons of Martin Luther, trans. by Joel R. Baseley. (Michigan: Mark V Publications, 2005), 3-4.)
 

개혁주의 창시자 칼빈은 루터처럼 로마 천주교와 재세례파의 신비주의를 반대하고 특별 계시의 종결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비 비 워필드가 말했듯이 ‘성령의 신학자’였다. 그만큼 기도를 많이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성령의 역동성을 당대에 회복하려고 노력한 신학자도 드물다. 어거스틴은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을 진정한 교회 갱신과 개혁으로 한 차원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개혁주의는 즈빙글리와 칼빈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그 사상적 기원은 성경과 어거스틴에게서 큰 빛을 졌다. 칼빈은 교회의 참된 회복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고, 그런 면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교회의 참된 회복과 연계시켰다. 요한 칼빈은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이 오늘날에도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비록 엄밀히 말해서 믿음은 말씀에 근거하고 그 목적을 말씀에 두지만 여전히 기적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단 그 기적들이 말씀과 연계되고 그것들이 신자의 믿음을 말씀으로 향하게 할 경우이다. 왜 기적들을 표적들(signs)이라고 했는지 이미 설명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이상하고 비범한 일들을 보여주심으로 그 기적들로 인하여 사람들로 당신의 능력을 생각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Gospel of John, vol. II, translated by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7), 281.)
 

   

▲ 칼빈은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나타난 은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일각에서 보통 칼빈을 은사중지론자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글들, 특히 고린도전서 주석을 보면 확실히 은사중지론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 당대에도 은사들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칼빈주석 중에서 고린도전서 14장에 관한 주석에서 그는 바울 시대에 빈번하게 등장하던 은사들의 풍성함이 왜 자신의 시대에 잘 나타나지 않는가를 물으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우리는 바울의 이 구절에서 어떻게 교회가 놀라운 부와 다양한 영적 은사로 말미암아 번창하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빈약한 재능과 결핍을 사실상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망은에 대한 대가로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풍요함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그의 관대하심이 줄어드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J. Calvin, 성경주석 19: 로마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서울: 성서원), 413.)

칼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렇다. 초대교회에 빈번하게 나타났던 은사들의 풍요함이 자신의 시대에 빈곤과 결핍으로 바뀐 것은 "우리의 망은에 대한 형벌"이다. 칼빈은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초대교회에 나타난 은사의 필요성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칼빈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영적인 불신앙과 게으름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관대하심으로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을 능력이 없지만, 경건을 실행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를 얻기에 게으르지 않는 한, 아직도 우리는 빛과 교훈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또한 나누어줄 수 있다." 대담하기까지 한 칼빈의 이러한 주장은 은사들의 풍요함이 사도 시대뿐 아니라 현 시대에도 여전히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칼빈의 이런 주장에 비추어볼 때 그가 은사중지론자라고 볼 수 없으며, 그러므로 은사중지론이 마치 개혁주의 신학의 본류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 20세기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A. A. 핫지, 스파라울. 파이퍼
 

미국 칼빈주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구프린스톤신학을 대변하는 찰스 핫지의 아들인 A. A. 핫지는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 기적이 초대교회에만 국한된 현상으로 보지 않았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는 하나님의 뜻의 도구일 뿐이며 그 도구는 기적이 발생되도록 더 높은 도덕적 다스림에 쓰임받는 것이다.”(* A. A. Hodge. A Commentary on the The Confession of Faith. With Questions For Theological Students and Bible Classe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869), 140.) 

기적이 현재에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긍정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기적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서 오늘날도 일어나는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고 섭리하시며 필요할 경우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주지했듯이 개혁주의 안에는 방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은사 중지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방언이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참으로 많다. 21세기 미국의 대표적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스프라울 박사(R. C. Sproul)는 방언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렇게 방언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했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아무튼 난 방언 은사를 구했고 나의 친구들과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난 방언으로 말미암아 큰 덕을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깨달을 수 있는 기도를 여전히 선호하고 있다. 한편 난 이 방언이 신약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인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기독교가 아닌 타종교에서도 방언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고린도전서) 방언이 외국어였다는 주장도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되지 않는다. <중략> 난 성령이 말씀과 반하여 결코 역사하시지 않고 언제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므로 난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난 여전히 오순절파 친구들과 교제하고 있고 그들의 기도 사랑을 기쁘게 지켜보고 있다. 난 오순절파가 시작된 교회의 삶 가운데 성령과 그의 역사로 말미암는 참된 부흥을 감사하고 있다. 한편 난 오순절 파에서 발생되는 잘못된 교리에 주시하고 있다.”(*R.C. Sproul, “Zeal Without Knowledge” https://www.ligonier.org/learn/articles/zeal-without-knowledge/). 만약 스프라울이 방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간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존 파이퍼는 방언을 성령께서 역사하는 영적 체험으로
말하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씀한 방언은 외국어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물론 파이퍼 박사 역시 오늘날 방언을 특별계시나 예언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표적인 개혁주의 침례교(Reformed Baptist) 목사이며 학자인 존 파이퍼(John Piper) 박사는 개혁주의를 평생 설교하고 가르쳤던 분이다. 이 분은 방언을 성령께서 역사하는 영적 체험으로 말하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씀한 방언은 외국어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물론 파이퍼 박사 역시 오늘날 방언을 특별계시나 예언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유다서 1장 20절 “성령으로 기도하며”를 해석하기를 이것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그 자신이 방언받기를 위해 기도했다고 고백하고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에 확신을 주시기를 자신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와 목양하는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방언하는 신자들을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또 목양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방언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방언이 교회에 중요한 은사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John Piper Inteview. https://www.desiringgod.org/articles/piper-on-prophecy-and-tongues).

 

 

김문제  munjett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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