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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글을 조작하는 정이철목사에게부활은 정이철목사의 주장과 같이, 믿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중요한 복음입니다.
바른믿음 정이철목사 / 무엇이든지물어보세요 이인규권사 운영자

상대방의 글을 조작하는 정이철목사에게

                                                  이인규

                                                   
1) 본인은 26년간 이단을 연구하면서 단 한번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사역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불완전하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또한 두 번 제사를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정이철목사와 그 측근 목사들은 단 하나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이런 조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난을 하려면 그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이런 조작을 하는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측은하며 불쌍하기도 합니다.

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9:12)

히브리서에서 비교하는 것은 십자가 제사와 하늘성소의 제사가 아니라, 짐승의 피를 드렸던 구약의 성소와 예수님의 피를 드린 하늘성소에 대한 비교입니다.
또한 본인은 지상의 십자가에서 드린 예수님의 속죄제사와 예수님이 하늘 성소에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신 사건을 두 개의 분리된 별도의 사건으로 보지 않으며, 동일한 하나의 사건으로 보며, 동일한 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의 제사가 곧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하늘성소에서 드려진 제사와 같은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러한 글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드려진 제사는 십자가와 하늘 성소에 드려진 두 번의 제사가 아니다. 그런데 그 단번에 드려진 한번의 제사는 십자가에서도 드려진 제사임과 동시에 하늘성소에서도 드려진 제사로 적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십자가에서 드려진 희생제사만을 강조하다가 하늘성소에 드려진 제사를 부정하여도 잘못이고, 하늘 성소에서 드려진 희생제사만을 강조하다가 십자가에서 드려진 희생제사를 부정하여도 잘못이다.”(카페에 올려진 필자의 글. 2016년 2월)
 
3) 필자가 하늘성소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므로 이단이라면, 히브리서 기자는 이단입니까?

지상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피로 드린 제사는 하늘성소에서 드린 제사와 분리된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고 이미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이단이라는 용어를 함부러 사용하며, 비인격적인 욕설과 비난을 하는 사람들과 일일이 논쟁을 할 가치도 없지만, 다른 사람의 견해를 조작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올바른 내용을 바로 잡아야할 것으로 보이기에 이렇게 글을 씁니다.


필자가 하늘성소를 말했기 때문에 이단이라면, 하늘 성소를 언급하는 아래 주석들과 신학자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보는지요?
 
- 마지막으로 “일년 일차씩” 지성소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레위 대제사장과의 대조에서(9:7), 저자는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로의 입성을 “단번에”라는 에파팍스(ἐφἀπαξ)라는 단어로 수식한다. 그 용어는 반복의 필연성과 가능성을 배제한다(Stαhlin, TDNT 1:383-84).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죽음, 승천, 그리고 하늘 성소로의 입성은 단일한 것으로 회고된다. 그러나 그 강조는 하늘 성소로의 도달과 영원한 구속의 성취에 있다. (WBC 히브리서-하, p.110)
 
- 한편 예수님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제사장 직분은 하늘에 속한 성소, 곧 참 하늘로 들어가는 길을 연다. 그분은 우리의 피를 위한 제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에 승천하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그분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 분의 제사는 아주 완전하셔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즉 그분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과 하늘의 올리우심은 반복될 필요가 없다. 참으로 그 분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IVP 성경주석, 1836쪽, 히 9:11-12)
 
- '단번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 팍스'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사역의 특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매년 반복되는 옛 언약의 구속 사역과는 달리 반복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이 없음을 시사한다(Morris, Lane). 한편 '성소'는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으로(Hewitt) 본절에서는 지상의 장막이 아닌 하나님의 존전인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Lane, Bruce, Morris). 그리스도께서 속죄 사역을 성취하셔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시사한다(Lane). (호크마주석)
 
-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를 통해 들어가신 곳은 지상의 성소가 아니다. 지상의 성소는 단지 외형적(外形的)인 것만을 속죄하는 불완전한 것으로 하늘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지상 성소의 실체인 하늘이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거하는 성소인 참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Hofius) 이미 십자가상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들처럼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위함이었다(Hewitt, Morris, Bruce).(호크마주석)
 
- 옛 언약의 성막은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 접근과 제한 속죄의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새 언약의 완전한 접근과 완전한 속죄로 개혁될 필요가 있었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드디어 새 언약의 중보로 단번에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셔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는 것이다(히브리서, 권성수, 총신대학교출판부, 263쪽)
 
- 3) 우리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 소나 염소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는 달리 자신의 피를 들고 하늘에 들어 가셨다.
4) 우리의 대제사장은 단번에 천국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다. (메튜헨리 주석 히 9:12)
 
- 따라서 그의 논증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모형은 수소와 염소의 피로 정결케 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하늘의 성막자체를 정결케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성막은 더 나은 것으로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은 것으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자의 피로 정결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9장을 읽고 8장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논증을 파악하기 위해 히브리서 전체를 읽길 바랍니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진술에 속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상적 장소 자체도 정결케 되어야 하며 예수그리스도 바로 자신의 피로 정결케 되어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배우게 됩니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마틴로이드존스, 463쪽)
 
그랜드 주석은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은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필자는 모든 주석과 모든 신학자들의 견해를 다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된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거룩한 원형이 어째서 정결케 되어야 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들을 시도하였다. 그 해석의 첫번째는 이것이 단순한 문학적 대구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Luther, Calvin, Ebrard). 즉 땅에 있는 것들이 정결케 되었으니 하늘에 있는 것도 정결케 되어야 한다는 단순한 대구법적 문학 표현이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욥15:15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하늘이라도 부정하게 보신다는 계시 문학적 개념에서 본절과 같은 표현을 했다는 견해이다(Michel). 세 번째 는 타락한 천사인 사단이 하늘에서 축출당한 사건(눅 10:18)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이다(Bleek). 네번째는 글자 그대로 하늘 성전도 정결케 됨을 받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다섯번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임재를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Bruce). 여섯번째는 하늘의 성소 그 자체는 부정하거나 더럽지 않으나 장차 성도들이 갈 곳이므로 그곳으로 갈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어야 함을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이다(Thomas Aquinas, Bengel, Delitzsch). 이상의 견해들 중 본절의 전후 문맥상에 있어서나 기독교 교리상에 있어서 나 가장 보편 타당한 견해는 제일 마지막 견해일 것이다. (그랜드 주석)
 
4) 부활은 정이철목사의 주장과 같이, 믿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중요한 복음입니다.

김성로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일부 성도들이 참된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으나,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다는 부활복음을 전하게 되자 많은 성도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였다고 간증을 합니다. 김성로목사의 부활복음은 이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며, 삶을 실제적으로 변화시키는 부흥의 원천이 되었던 것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볼 때에도 부활은 칭의의 근간이 되며(롬 4:25), 중생의 소망이 되고(벧전 1:3-4),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모든 인류의 구원은 성취되지 않았으며(롬 6:5, 8:11, 고전 15:21-22),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사탄이 승리한 것이 되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가 존립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필자는 예수의 탄생, 공생애, 죽음, 부활, 재림 모두가 중요한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며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정이철목사와 같이 십자가 죽음만 믿으면 된다는 주장이야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박형용 교수는 리차드 개핀 박사의 「부활과 구속」 추천사 일부 중 성도의 구원에 있어서 부활의 중요성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사건이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죽음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러나 서방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구원 문제를 논할 때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부활보다 더 강조하여 다루었다. 예수님의 죽음을 속죄(atonement)의 성취로 강조하여 생각하는 태도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큰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는 부활에 대한 강조가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구속의 완성, 구속의 종결로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서 구속의 성취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을 대치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구속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더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Gaffin 박사는 바울 신학의 중심주체인 부활을 성도들의 구원과 결부시켜 다룬 다음 예수님의 부활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한다.”
 
- 바빙크는 말하기를 “만일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살지 못하셨다고 말한다면 죄악의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가 정복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승자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사탄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하였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으셨다는 부활신앙이 아니었다면 기독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증거에 의하여 확실하다. (개혁주의 교리학, 박윤선, 279-280쪽)
 
구원은 몸의 부활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이유입니다. 돌아다니면서 몸의 부활이 없고 영적인 부활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15:17) - 구원이 없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여러분에게 처음 왔을 때 전파한 이 믿음에 굳게 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전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구원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입니다” (마틴로이드존스, 교회와 종말에 일어날 일, 기독교문서선교회, 282쪽)
 
부활은 칭의와 중생과 연관되어집니다.
 
- 부활 교리의 중요성
a.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중생을 보장해 준다 : 벧전 1:3
b.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칭의를 보장한다 : 롬 4:25
c.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도 완전한 부활의 육신을 받게될 것을 보장한다. 고전 6:14, 고후 4:14, 고전 15:20 (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167-170쪽)
 
-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시 그들의 칭의와 중생 그리고 마지막 부활과 도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롬4:25, 5:10, 엡1:20, 빌3:10, 벧전1:3) (벌콥조직신학 하권, 71쪽)
 
- 오히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이 구성요소로서 구속사역의 본질, 따라서 복음사역의 본질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가장 큰 기초석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역은 만일 그것이 전적으로 유효적이었다면, 죽음이 아닌 생명에서 종결되어야만 하였다. 더 나아가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성부의 인치심이었으며 그것은 수납(acceptance)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셔서 놓여지신 교회의 머리와 보편적 주님으로서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신 것이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구의 구속사적 사역의 열매들을 사용케 하셨다. (벌콥조직신학 하권, 74쪽)
 
게리 브레셔츠는 웨스턴신학대학의 신학교수이며 신학 연구 학과장이다. 또한 마크 드리스콜은 시애틀의 마스힐교회를 세운 목사로서 사도행전29장 교회개혁네트워크 대표이고 부활선교 신학협회를 설립한 목사이다.
 
예수님이 지금도 죽어 계신다면 기독교도 죽은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면 기독교도 살아있다. 바울 자신이 고린도전서 15장17절에서 그렇게 선언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구주도 없고 구원도 없고 죄 용서도 없으며 영생의 부활에 대한 소망도 없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은 또다른 선하지만 죽은 인간에 불과하게 되고, 따라서 이 세상에서나 죽음의 순간에 우리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쉽게 말해서 부활이 없으면 오늘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쉽게 속는 사람들이다. 내세의 부활 생명에 대한 그들의 소망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겠다는 한 죽은 사람을 신뢰하는 어리석은 바보들의 소망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교리는 의문의 여지없이 매우 의미심장하며 극히 세심한 숙고와 고찰이 필요한 교리이다.(기독교 교리, 마크 드리스볼, 게리 브레셔스 공저, 부흥과개혁사, 371-372쪽)
 
기독교 강요에서 캘빈은 다음과 같이 부활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다음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다. 이것이 없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논한 모든 체계는 불완전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에서는 연약함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앙은 그 완전한 힘을 얻기 위하여 이 모든 사실들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죽음을 통해 구원의 완성을 이룬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했고, 그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충족되었으며, 저주는 제거되고, 형벌은 완전히 치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벧전 1:3).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죽음을 이긴 승리자로 등장한 것처럼, 죽음을 이긴 우리 신앙의 승리 역시 그의 부활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다음 말이 그리스도 부활의 성격을 잘 표시해 준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말은 마치 그가 "죽으심으로 죄는 제거됐고 그의 부활로서 의는 다시 살아나 회복되었다"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가 만약 죽음에 굴복했다면, 그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 만약 그가 이 싸움에서 졌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요소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서는 죄가 제거되고 죽음이 소멸되었으며, 그의 부활을 통해서는 의가 회복되고 생명이 되살아나 그의 죽음이 우리 안에서 능력과 효력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부활의 덕분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느니라"(롬 1:4)고 말하였다.
 
5) 오히려 정이철목사의 주장에서 상당히 위험한 주장들이 발견되는데, 다른 사람의 주장을 왜곡하고 조작하기 전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해명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김성로목사는 표현에서 몇가지 실수를 한 것에 대해서 (결코 이단이라고 말할 수 없는 착각) 모두 인정하고 그것을 완전히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위험하고 심각한 주장을 한 정이철목사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 수정을 한 적이 없습니다. 미주 남침례교단에서 정이철목사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불안을 느낀 정이철목사는 남침례교단이 김성로목사의 거액을 받고 자신을 이단으로 조작한다는 허위사실을 미국목사들에게 유포하고, 한국에 와서 조작된 기자회견을 하고 있습니다.

정이철 목사는 자기의 주장에 대해서 당당하게 해명하기 바랍니다.
 
⓵ 정이철목사는 예수님이 속죄의 혜택을 받은 첫 샘플이라고 하였는데, 무죄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속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가?
⓶ 정이철목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3일 동안 부패하였는데, 하나님이 재창조하셨다고 주장하였는데, 개혁주의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조 8번 기독론을 정면으로 위배되는 주장을 한 이유는 무엇이며, 끝까지 옳다고 변명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예수님이 재창조되었다면 예수님은 피조물인가?
⓷ 정이철목사는 마귀도 하나님의 종이고, 오바마도 마귀의 종이며, 김정일도 마귀의 종이라고 하였는데, 물론 하나님이 마귀를 도구로 사용하실 수는 있지만, 수많은 기독교인을 죽인 김정일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김정일의 행위는 하나님이 시키신 것인가?
⓸ 정이철목사는 “부활은 믿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 오는 것”이라고 했는데, 자신은 부활을 명백하게 부정해도 아무 문제가 없으며, 김성로목사가 부활을 강조하면 그것을 십자가 속죄사역을 부정한 것으로 매도하여도 괜찮은가?
⓹ 정이철 목사는 이스라엘 대제사장이 하늘성소에서 예수님의 피를 뿌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죄가 많은 불완전한 인간 대제사장이 어떻게 하늘성소에서 피를 뿌렸다고 생각하는가? 

정이철목사야 말로 예수님의 피가 지상과 하늘성소에 두 번 뿌려졌다고 보는가?


⓺ 정이철목사는 왜 베리칩과 음모론을 주장하며 오직 믿음을 비판하는 목사의 교회에 가서 세미나를 해주었는가? 필자가 그곳이 잘못된 교회라고 사전에 메일로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모르고 갔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⓻ 정이철목사는 개혁주의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5대조항을 비난하고 부정하는 목사들과 교류를 하며, 캘빈을 살인자라고 하는 목사들과 교류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⓼ 정이철목사는 필자에 대해서 전혀 사실이 아닌 허위사실을 미국목자들에게 메일로 유포하였는가? 나는 김성로목사의 컬럼이나 글을 써준 적이 없다. 또 미주 남침례교단에서 김성로목사에게 거액을 받고 자신을 이단으로 규정하려고 한다는 허위사실을 미국목사들에게 유포한 근거는 무엇인가?
조작에 의하여 이단으로 몰았던 김성로목사를 교단에서 조사하면 당연한 것이고, 더욱 위험하고 심각한 주장을 한 정이철목사는 조사를 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⓽ 정이철목사는 그동안 필자에게 이단, 이단옹호자, 뱀, 사탄, 회색인간, 돈을 받고 이단을 옹호하는 자, 교활한 자....라고 각종 욕설과 비인격적인 비난을 한 근거는 무엇인지를 밝혀주기 바란다.
⓾ 정이철목사는 필자가 성경의 특별계시를 부정하였다고 비난하였는데, 필자는 성경의 특별계시에 대해서 부정한 적이 없다. 필자가 쓴 책은 “신사도운동의 정체와 비판”으로서, 신사도운동의 예언과 직통계시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내용이며, 성경이 유일한 객관적인 진리의 기준이며, 성경의 성취성과 완전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필자가 “특별계시가 오늘날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특별계시”라는 신학적 용어에 대한 정의를 말한 것으로서, 많은 조직신학자들은 특별계시가 보편적으로 성경을 뜻하지만, 특별계시라는 언제나 성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연속을 뜻하기도 한다.
   

“특별계시와 성경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다. 특별계시란 말은 언제나 똑같은 뜻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연속을 뜻하는 것이지만, 또한 성경의 칭호로 사용되기도 한다.”(루이스벌콥, 기독교신학개론, 45쪽)

루이스벌콥은 그의 조직신학 상권에서 특별계시의 방편에 대해서 세가지로 분류한다 (1) 신현들 (Theophanies) (2) 전달들 (Communications) (3) 이적들 (Miracles)로 분류하고, 박윤선 박사는 개혁주의교리학(영음사)이라는 책 27-37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특별계시를 여섯가지로 분류한다.
즉 (1) 하나님의 나타나심 (2) 이적과 기사 (3) 예언 (4) 꿈 (5) 이상 (6) 성경이다.

필자는 성경이 유일한 특별계시라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아래가 그 책의 본문에 있는 내용이다.

성경의 객관성과 완전성에 대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인정을 하여야만 한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성경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신앙은 재점검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계시나 예언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이미 사실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온전히 입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이 없던 시대에는 예언과 계시가 필요하였지만, 성경이 있는 시대에는 거꾸로 예언과 계시가 성경으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의 객관성과 성경의 완전성을 인정한다면, 기록된 성경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이 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본문에서 예수의 말씀은 곧 신약성경말씀을 뜻하며, 신약의 기록이 곧 하나님의 최종적이며 온전한 계시임을 증거하고 있다. 신약 계시에 추가할 또 다른 계시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궁극적인 계시(final revelation)가 된다는 것이며, 모든 성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로 성취되어진다.

정이철목사는 자기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글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든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만을 골라서 조작을 하는 아주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김성로목사가 “쓸데없이 십자가만 이야기하지 말고....”라고 말한 것만 반복적으로 올려놓고 마치 김성로목사가 “쓸데없는 십자가”라고 말한 것처럼 조작을 하고 있다.

김성로목사의 전체 멧세지는 십자가 죽음만 믿지 말고, 부활까지를 믿어야 한다는 믿음의 범위에 관한 내용이다. 김성로목사는 십자가가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것을 쓸데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물론 표현적인 잘못은 있었지만 결코 십자가를 부정하거나 모욕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문제  munjett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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