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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운동 성경닮기인가?:목회와진리수호

목회와진리수호

베뢰아운동 성경닮기인가?

[ 그 허상을 벗긴다 ]

목회와진리수호 | 기사입력 2016/06/20 [15:02]

베뢰아운동 성경닮기인가?

[ 그 허상을 벗긴다 ]
목회와진리수호 | 입력 : 2016/06/20 [15:02]

원 문 호 목사

이 글은 1996.11,21 (목) 오후 6시 여전도회관에서‘한국교회 평신도 지도자 협회’가『베뢰아운동 무엇이 문제인가』공청회를 개최코자 했으나 무산이 되었다. 그 때에 베뢰아측 한상식 목사가(베뢰아국제진흥원장) 발표할 예정으로 준비된 원고를 현장에서 기자들에게 배포한 그 전문이 ‘풀빛목회’19

96.12 월호‘특별기고’로「베뢰아 운동은 성경닮기 운동이다」56-73 쪽에 싣다. 이를 고맙게 여기며 필자는 공청회 발표예정 원고를 중심으로 베뢰아측에 객관적 이해에 올바른 도움을 위한 차원에서 그 허상을 밝히는 글임을 염두에 두자.

베뢰아측 한상식 목사는 한국교회가 베뢰아운동을 이단시하는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고 밝힌다.

‘성경과 교회사의 교훈에 무지하기 때문이다’(전문 56쪽), ‘교권주의에 사로잡힌 일부인사들이 연구소란 이름 아래 이단사냥 (?)을 일삼고 있으며, 교단 총회들이나 교계연합기관들은 전문가로 자처하는 그들에게 농간을 당하고 있다.’ (전문 57쪽), ‘한국교계 일각에서는 베뢰아 마귀론이 기독교에 민속사상을 혼합시킨 것이라고 비판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신유나 축사에 대한 영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에 기인한다.’(전문57쪽)

따라서 베뢰아 이단규정은 영적 이해의 부족으로 그 뜻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어 생겨 났다는 것이다. 베뢰아측은 기성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것에 대하여 자신들은 추호도 잘 못이 없다는 입장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계에 대한 베뢰아 사람들의 입장을 밝힌다는 것이며, 자신들은 열린 마음으로 한국교회의 일원이 되기를 노력하고 있다’(전문58쪽)는 표명이다.

그러나 이같은 입장 표명은 ‘찐 호박에 이빨이 들어가는 소리가 아니다. ‘○’같은 종류나 찐 호박을 물을까 ?’ 말이다.베뢰아 측이 먼저 알것은 ’한국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자신들이 주장하는 비정통성향 이단신학사상을 버리는 것이다. 이단신학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정통의 회중에 들 수가 없음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자신들은 이단의 반복음에 내용이 없는데 당한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지를 말고 이단사상을 버림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혹이 자신들은 이상적 신약교회라는 착각에서 교계에 교권주의 횡포와 박해속에 농락을 받은 선의에 피해자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초대 신약교회는 결코 베뢰아측에 반복음적 이단신학사상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면 공청회 발표예정 원고의 차례에 따라 교계와 성도의 보호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반면에 베뢰아측에 신앙인들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단성의 비복음에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바른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 전문56 - 58쪽 확인 )

① ‘베뢰아운동은 20세기의 주도적 신앙운동인 복음주의와 오순절운동을 부인하지 않으며 동시에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않고 “교회는 성경을 닮고 성도는 교회를 닮자”는 신본주의 신앙운동을 전개 하자는 것이다.’(전문 57쪽)

② ‘오순절 운동은 하나님의 나라 신학에 근거한 제3의 물결로 이어지고 있다. 제3의 물결의 두 기둥은“전인 치유와 축사”이다(전문 57쪽)

③ ‘필자는 베뢰아운동의 미래, 혹은 베뢰아운동의 성패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여긴다. 베뢰아에 대한 이단시비도 결국 기독교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전문58쪽)

이상에 ①②③은 1번의 내용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과연 이들이 주장하는 입장에 글은 ‘이중성’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① 의 내용에 베뢰아 운동은 복음주의와 오순절운동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 또한 일치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비판을 받은 반복음적 이단성 주장은 초대교회의 복음주의, 오순절 운동이 지지를 하거나 동의하지 않는다.

어느 한편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했으나 ‘베뢰아 귀신론’에 치우쳐 정통기독교에 도전을 하고 있음이 현실이 아닌가 ?이미 비판을 받은 내용은 초대교회의 신앙정신이 아니다. 그리고 알 것은 초대 베뢰아 사람들은 베뢰아측에 이단신학사상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뢰아 측은“교회는 성경을 닮고 성도는 교회를 닮자는 신본주의 신앙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에 신앙운동 전개가 성경을 닮는 교회인지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을 닮는 교회는 베뢰아측의 반복음적 학설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약교회는「양태론이나, 영이 없는 이중창조나, 권능을 천사라는 주장이나, 구약에 하나님의 신이 천사라거나, 인간의 영이 비인격이다, 인간의 사후 영이 귀신이다. 인간의 자연수명이 120년 이다. 불택자의 영의 대기소가 이 세상이다. 그리고 음부이다. 지금도 천사가 타락한다. 축사시 욕을 해서 쫓으라. 교만죄는 속죄를 받을 수 없는 제한 속죄를 지지한다. 현재 성경으로는 예수를 다 알지를 못한다.」라는 등....이는 이미 교회가 성경을 닮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성도는 교회를 닮자라는 신본주의 신앙운동을 전개를 하자는데 성도는 교회를 닮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야 함이 복음이며(롬8:29),예수님을 닮는 성도의 모임인 교회의 지체가 성경대로 행할 때에 신본주의 운동인 것이다. 교회의 모범은 초대교회이며 부패한 교회의 모습은 결코 성도가 닮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들에게 성령님의 책망을 보자.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를 닮는 것이 아니며, 맏 아들이 되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베뢰아식의 반복음적 교회를 닮아야 할 이유는 더 더욱이 없는 것이다.

베뢰아 측에서 주장하는 일에 깨달을 것은 다만 학설일 뿐이라는 식으로 발 뺌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주장과 학설이기전에 신앙생활에 절대적 가치로 물결치고 있는 것이다. 베뢰아의 이단사상을 빼면 이는 마치 ‘앙꼬 없는 찐빵이나’ ‘김이 빠진 사이다 콜라나’ 다를바 없다. 그러므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절대적 가치가 아닌 주장이나 학설을 복음으로 포장을 해서 먹인다면 그는 목자의 음성을 전하는 자가 아니다. 주의와 학설중에도 이단신학사상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신본주의 신앙운동은 성경을 떠나서는 용납되지를 않는다.

② 오순절운동은 제3의 물결의 두 기둥인 “전인치유와 축사이다” 라고 주장한다. 오순절운동의 본질이 전인치유와 축사가 아니다. 오순절운동은 ‘베드로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리라.’(행2:14),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2:21,23,24,31-32)‘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3).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2:36),이다. 전인치유와 축사는 ‘제자들이 나아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1:20), 그러니까 말씀에 증거를 위한 표적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운동의 본질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그를 믿는자의 구원에 역사이다. 이 증거를 위한 성령의 임하심과 권능을 수단으로 전인치유와 축사의 물결은 본질을 이루는 한 방법에 일부이다. 전인치유와 축사가 오순절운동의 본질적 주체가 아니며 객체로서 수단일 뿐이다.

③ 베뢰아운동의 미래와 이단시비의 성패는 역사적 관점에서 기독교 역사가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필자의 입장을 밝히는데 그의 말대로 베뢰아의 이단시비는 기독교의 역사적 관점의 시각에서 선 조명이며, 판단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 것이다. 이는 결코 성경에 무지하고 교회사를 모르는 자들에 의하여 남을 교묘한 꾀로 속이여 제 마음대로 놀리는 간사한 짓에 결과가 아닌 것이다. 또한 베뢰아의 마귀론이 기독교와 민속사상에 혼합을 시킨 것이라는 비판이 신유축사에 대한 영적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 오해가 아니며, 베뢰아의 현상학적 학설을 근거로 성경 조명에 의한 검증 판단인 것이다. 베뢰아 운동이 왕성하여져 간다고 하여도 이는 반복음적 내용을 절대가치로 신앙하는 결과이므로 이는 잡초의 무성함에 비교되는 것이다.

베뢰아의 학설이 절대적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합법화하는 것은 불법이며, 그 사상을 진액으로 자라는 것은 가라지의 성장이며, 이들의 무리는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불법적 행위 자이다. 현상학적 엄연한 사실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라는 것이다.

베뢰아 측이 이단의 소리를 듣는 것은 학설에 추종자가 다수가 아니기 때문에 소수의 세력임으로 당하는 것이라는 망각을 하지를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반복음적 베뢰아 측의 사상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베뢰아 학설을 버리고 복음대로 행한다면 이를 이단시하는 세력이 의문시 되지만 베뢰아 측은 여기에 해당하지를 않는 것이다.

기성교회가 정통이라는 이름 아래 베뢰아 측이 바른 신약교회 이상을 따르는데 이단으로 핍박함이 아니다. 때로는 성경의 무지나 교세확장에 지나친 자기의 義와 욕망이 교리적 이단으로 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으나 이는 신학의 오류에 결과 현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단을 규정하는 것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가 잣대가 되는 것이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성도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평범한 진리안에 있다는 사실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위대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베뢰아 측의 성경 주장에는 거부 한다는 것이다. 베뢰아 측은 신학의 초기 논쟁사에 끊임이 없는 주의를 빙자하여 자기들의 주장도 그와 같은 학설의 한 부분이라고 견재하는 자기 변호를 하지만 성경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 본인은 신학을 말함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오류성 신학으로 성도를 양육하여 그 후예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지도자는 수고해야 한다. 양들은 오류를 주장하는 신학자의 학설에 음성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며,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함을 익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의 논쟁사에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 알고 성도들에게 이를 알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 하는가를 가르쳐야 한다. 신학은 성경적일 수는 있으나 결코 성경은 아닌 것이다. 베뢰아 측에 기독교 기본교리에 전반에 걸쳐서 이미 성경을 탈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각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들을 참고하면 유익 할 것이다.

2. 베뢰아운동은 성경에 기초를 둔 신약교회 운동이다.( 전문 58-60 쪽 확인)

①「 “베뢰아”란 이름은 사도행전17:11,12에 나와 있는대로 ‘성경을 상고하여 성경에서 믿음을 얻는 사람들이 되자’ 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선입관이나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전문 59쪽)

②「 김기동 목사는 베뢰아운동을 이러한 베뢰아 사람들의 정신을 본 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경읽기 운동이라고 정의하고 그 개념은 1) 신약교회운동 2) 성경닮기 운동 3) 평신도운동이라 하였다. 다시말해 베뢰아운동은, 교회는 신약성경을 닮고 성도는 교회를 닮자는 신앙운동이다.」 (전문 59쪽)

③ 베뢰아인의 모범, 베뢰아운동의 개념,이상「이를 교회사적으로는 16세기에 종교개혁정신을 되살리는 개혁운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 미국의 대각성운동이나 독일에 경건주의 운동처럼 한국교회도 교권주의,인본주의, 세속주의, 신비주의 등을 청산하려면 초대교회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고 상고하며 믿는 운동이 필요 하겠다. 기독교계의 타락이나 세속화는 전통이나 교리나 헌법 등 인위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울 때 일어난다는 것이 교회사의 교훈이다.」(전문 60 쪽)

이상에 ①②③은 2 번의 내용에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이들의 비본질적인 주장이 무엇인지 알아 보도록 하자.

① 베뢰아란 이름의 선택의 취지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그럴싸한 타당성을 말하고 있다. 성경을‘선입관이나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고 한다. 이 말은 극히 복음적인 입장에서 성경에 접근하는 좋은 방법으로 이해가 되나 베뢰아 측에 성경을 주장하는 학설을 보면 인위적이고 비본질적인 사단신학사상으로 가득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이는 긍정적인 면에서가 아닌 부정적 면에서 자기견해의 자의해석에 유도하여 암시를 시키려는 간교한 사단의 속임수 전략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보고 가르침을 받는 일에 이미 성경적 신학교리의 선입관을 패쇄를 시키는 것은 속이는 자의 위장수법인 것이다. 베뢰아 측에 하나님의 의도 선택의 취지 결과가 이단신학사상으로 빠지지 않았다면 문제는 다르다. 따라서 타당성이 있는듯한 뜻으로 성경을 선입관이나 교리에 집착하지 않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그 결과가 사단신학사상 열매라면 변명할 수가 없는 속임수 선전이론에 효과를 낸다.

② ‘베뢰아 운동은 교회는 신약성경을 닮고 성도는 교회를 닮자는 신앙운동이다’ 라고 한다.

성도는 베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신앙의 자세로 성경을 상고하는 일을 모범으로 본 받아야 할 것이나, 베뢰아 측은 어떻게 성경을 신사적으로 간절한 열린 마음으로 받기에 이단으로 규정을 받는 사단신학사상인 비본질을 성경인양 주장을 하고 따르는가 말이다. 이것이 신약성경을 닮은 것인가 ? 또 한가지 편중된 주장은 교회는 신약성경만 닮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교회는 신구약성경 66권을 신앙정신으로 닮아야 하는 것이지 신약성경만을 닮으라는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으며, 배뢰아 운동이 베뢰아 사람들을 모토로 한다면 더욱이 그들은 교회가 신약성경만을 닮으라고 말한 적이 또한 없다. 그리고 교회의 모범은 초대교회가 ‘모델’인데 ( 마16:16-18), 초대교회의 신앙정신은 결코 베뢰아 측의 선택된 자의적 해석이 아니다.

베뢰아운동은 ‘성도가 교회를 닮자는 운동이라’는데 교회의 개념을 바로 이해를 한다면 성도가 닮아야 할 것은 ‘그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의 모임을 가르치는’ ‘에크레시아’ 가 아니며, 성도는 예수님을 닮도록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심을 알자. (롬8:29)그리고 성도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엡4:15)

‘성도는 교회를 닯자는’ 곳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는 있어도 성도는 교회를 닮자라는 열린 마음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베뢰아운동은 어떻게 그들의 정신과 겸손한 마음을 본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성경읽기 운동을 했기에 그 결과가 베뢰아 학설의 신앙에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버리지 않는가 ? 학설이라구만 말을 하지 말고 성경이 아니면 배설물같이 버리는 것이,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베뢰아 사람들의 모범이 아닌가. 베뢰아 측은 마음을 어디로 열어 놨기에 어떻게 겸손하게 간절 했기에 초대 베뢰아 정신에 빗나가는 결과를 초래 하는가를 깊히 생각해 볼 문제이다.

베뢰아 측에 성경주장은 베뢰아 사람들의 얼굴에 불명예라는 사실인 것을 알고, 다시는 반복음적 내용으로 초대 베뢰아 사람들의 복음적 믿음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를 말고, 비복음 이단신학사상에 초대 베뢰아 사람들의 얼굴을 빌어 베뢰아 측에 얼굴 마담을 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초대 베뢰아인들이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온다 하여도 과연 베뢰아 측에 반복음에 동의를 하리라 보는가 어림도 없는 것이다. 정상적인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정신에 조명을 받아 진리의 참 됨을 더욱더 돋-보이게 함이 아름다운 것이다.

 

③ 초대교회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고 믿는 운동이 필요 하겠다 비본질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보다 앞세울 때에 개혁운동이 일어남이 교회사의 교훈이라고 말함에 있어서 과연 베뢰아측은 개혁운동을 운운할 기본적인 성경의 본질을 갖추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베뢰아 측은 초대 베뢰아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혁을 말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정통성을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베뢰아 측은 사단신학사상을 학설에 절대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복음에 비본질이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는 거치장 걸이요 기독교계를 근본적으로 타락을 시키는 비진리라는 점이다.

기독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기존교회 부패된 모습에 개혁이나 갱신의 소리를 높일 수는 있으며, 또한 개혁을 하자는 이들은 개혁운동에 기본이 성경에 합당한 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돌팔이에게 환자를 맡낄수가 없음이 자명함에 비교된다. 기독교가 상종할 수가 없는 이단이 개혁을 운운함은 자유하나 그들의 이단성에 비본질을 가지고는 개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맡끼다면 마치 고양이에게 고기를 맡낌과 같은 꼴이 아닌가 ? 이단자가 먼저 알것은 이단적 요소를 복음사상에 굴복을 시키고 기독인으로서 기독교를 갱신운동에 수고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한국교계가 각성할 일은 이단들이 개혁의 소리를 높이는 비판의 소리에 자각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기성교회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부분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한편 이단의 경우 기성교회를 향한 개혁의 비판의 소리는 마치 똥 묻은 염소가 재가 묻은 양을 나무라는 격이 아닌가 ? 그러나 저러나 기존교회가 이단자에게 고얀히 약점을 잡히는 부패한 행실은 하루 빨리 속히 청산함이 주님의 기대임을 명심함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교계의 교권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 기독교를 세속화하는 전통이나 교리나 헌법의 새로운 변신의 필요가 요청된다. 그리고 성경을 비기독교적 방법에 도용함으로 오는 범죄들은 하루 빨리 뿌리를 뽑아야 한다. 제도적 구조악의 제거와 개선을 비롯하여이를 이루기 위한 급선무는 먼저 사람이 복음으로 변하는 일이다. 인간이 바르면 비록 악법이라도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며 선한 일에 방향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듯이 개혁자는 기독교의 본질을 떠나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 할 수가 없음에 더욱이 이단자의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는 것이다.

기성교회가 각성할 것은 세속화된 부패의 요소가 이단을 더욱더 잘 자라게 하는 성장과 발전에 요인을 제공 한다는 점에서 정신을 차려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베뢰아 측에서 개혁을 운운하나 먼저 이단신학사상을 버림이 선행되어야할 대상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태여나는 근본적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을 알고 이단사상을 복음에 굴복을 시키는 자체적 실천을 촉구한다. 이 마음을 가지고 이단사상을 개혁함에 헌신의 노력을 다하여 새롭게 태여나면 한국교회 일원이 되는 첩경의 길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먼저 교파와 교회간에 일원이 되지 못하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원인에 근본을 무시하고 행하는 모든 종교개혁을 운운하는 소리는 이단자의 아집과 편견으로 밖에 볼 수가 있는가 ? 비복음적 베뢰아 학설로 애매한 양무리나 신앙인에게 피해를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지도자라면 성경이 아닌 이단신학사상의 학설로 말미암아 인간사에 불편을 느끼게 하고 골육친척이나 이웃간에 담을 쌓고 살게할 이유가 있는가 말이다. 성경이 아니면 버리고 성경대로 하면 만사가 다 해결인데 그릇된 이단사상을 추종함이 바로 그들의 운동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함을 알고 이단적 비진리이면 떠나거나 개혁에 기치를 들고 이를 추방을 시켜야 한다. 이단의 사상을 가지고 정통교회와 싸우지 아니함이 지혜롭다. 비록 교회가 도전을 받는다 하여도 음부의 권세가 이기는 법이 없다. (마16:18), 이단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기존교회를 계속하여 도전하는 일에 일원이 되었다면 자신의 구원이 의심스러울수가 있다. 성경에 보면 ‘주여 주여’ 하다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 가라는 자가 있다. 그리고 열처녀중에 미련한 다섯이 있는데 이들이 신랑을 기다리는 무리임에도 불구하고 혼인잔치에 들어 가지를 못하는데 이들 모두는 주님이 알지 못하고 도무지 모르는 자들이다. 그중에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한 자들이 있다. 그럼에도 혼인잔치나 하늘나라에 들어 가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불법을 행하였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교화 되어진 자연종교인에 불과한 신앙인들인 것이다.

베뢰아 측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자고 성경닮기 운동을 전개 하자는 ‘스로간’을 걸고 소리를 높이면서 어찌하여 성경을 그대로 받지 아니하고 자의적 해석을 받는 것인가 ? 베뢰아측에 이단성 비판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가 아님을 깨닫고 그곳에 신앙인들은 이점에 눈과 귀를 열고 비복음사상을 자체적으로 타파해야 한다. 성경신학 제자리 찾기 운동을 벌려서 복음안에서 교계가 일치하고 연합함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단성을 버리면 다들 평안한데 거짓된 비복음이 문제인기라. 이것을 파하는 것이다.

 

* 고후10:4-7“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3. 한국교회의 이단 사이비 규정은 이솝 우화의 양치는 목동 이야기와 유사하다. (전문 60-61 쪽 확인)

 

① (통합)측은 지난 수년동안 20여개 개인이나 교회들을 이단. 사이비로 정죄를 하였다....예장 통합측의 이런 사정을 듣다 보면 이솝 우화의 양치는 목동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

전문 60 쪽)

② 1980 년대 말 특정 인사나 교단들이 앞장서서 “이단이다 ! 사이비다 ! ○○ 은사운동은 이단이다 ! ○○전도운동은 사이비이다 !” 하는 동안, 교계에서 어느새 교회성장이 둔화된다, 교회들이 문을 닫는다. ( 전문 61쪽 )

③ 이제 교계는 달라져야 한다. 왜 함부로 신앙적 이단이라고 정죄하는가 ? 거짓말하는 목동과 같은 이단감별사들에게 더 이상 놀아나서는 안된다....한국교회가 예수를 부인하는 이단을 막고 ,사단으로 부터 양들을 보호하려면 목동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 전문 61쪽 )

 

이상에 ①②③은 3 번의 내용에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이들의 말대로 이단 사이비규정이 철부지 목동의 심심풀이인가 ? 함부로 정죄하고 이단감별사 거짓말에 놀아난 결과인가 ?

 

① 통합측에서 20여개 이단 사이비로 정죄함을 양치는 이솝의 우화에 목동에 비교를 했는데 어떻게 사람을 놀라게 함이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이같은 짓을 했는지 그 내용을 밝힘이 설득력이 있으며, 그 타당성을 지면을 통해서 공개할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비싼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니 사이비 이단규정자가 백수건달(白手乾達)이란 말인가 ? 아무것도 없는 종교건달의 짓이란 말인가 ?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이단규정을 심심풀이로 하는 그 목동이 과연 누구인가 ? 그리고 이단감별사의 거짓말에 놀아난 결과라니 그 거짓말을 어떻게 했는지 그 근거 출처가 자료에 의존된 여부가 밝혀져야 함이 공신력이 있으며, 심심풀이로 어떻게 사실과 어긋나게 꾸며서 말을 했으며,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꾸며서 거짓부렁을 허위로 했는지 그 진부를 가려야 한다. 이는 또한 교계정화를 위하여 밝힘도 개혁을 위한 교육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베뢰아 측에 조심스런 발언은 한국교회의 이단사이비 규정이 통합측, 1980년대 말 특정인사나 교단들이 앞장서서,이제 교계는,이라는 글귀 문서로 ‘이솝의 우화의 양치는 목동’에 유사성에 한국교회 이단사이비대책 보호차원에서 은사로 봉사하는 이들을 도매금으로 훌 몰아서 철없는 목동의 심심풀이로 거짓말을 함부로 했다는데 이로인해 각교계 교단을 비롯하여 정상인의 명예와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은 종교비판에 위법으로 자유한계선을 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거짓말을 하는 이단감별사와는 구별이 됨이 바람직한 것이라 사료가 됨으로 이를 밝혀 주기를 바란다.

따라서 불분명한 자신의 추측과 자료에 의존하여 이를 발간함으로 교단과 교계의 명예를 극도로 훼손하는 경솔한 버릇은 뿌리를 뽑아야 할 것이다.

② 이단규정이 교계의 성장을 둔화 시킨 것으로 그리고 교회의 문을 닫는다는 표현을 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 주기를 바란다. 은사운동이나 전도운동이 이단시비규정에 저촉되는 점에 대하여 부분에 대하여 관용할 수가 있다고 보는가 ? 교계의 성장둔화를 목적으로 이단을 규정하는 이가 있다고 보는가 ? 교회문을 닫음을 목적으로 이단을 규정하는가 ? 한국교회가 이단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영적세계를 혼란케 하는 시점에 이를 묵과하려는 의도적 행위는 그 근본 신앙의 뿌리가 의심 스럽지 않는가 ? 성도라면 이단의 무리와 협조하여 이단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뿌리가 내리지 못 하도록 진리수호에 앞장을 서야 하지를 않는가 ? 베뢰아측의 이단신학사상으로 한국교회에 미친 악 영향에 대하여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깊이 생각하여 자숙하는 마음으로 각성을 촉구한 적이 있는가 ? “그는 1983년 자신이 속했던 침례교 총회에 이중아담론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각서를 제출했다.”[기독교세계 1991,9.14쪽‘이단사상의 미혹을 경계하라’에서 인용] 과연 각서의 내용을 이행을 하였는가 ?

이단규정으로 말미암은 교회성장 둔화의 측면이 사단의 훼방적 전략에서 생각할 수가 있으며 이에 반해서 오히려 이단사상의 악 영향의 결과에 따른 사단의 훼방이라 함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단사상에 대한 무지가 그러한 결과를 낼 수가 있다고 예측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단규정은 교회를 보호하는 차원이지 교회의 문을 닫게 함에 그 목적수행이 아니다.

③ 이제 교계는 달라져야 하는데 거짓말하는 목동과 같은 이단감별사들에게 더 이상 놀아나서는 안된다 양들을 보호를 하려면 목동의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라고 주장함이 교계를 상대로 함에 대하여 그러면 이단감별사가 어떻게 거짓말을 했는지 그 내용에 출처 증거확보를 공개하고, 목동의 거짓말에 이단감별사가 놀아 났다고 하는데 어느 때와 장소에서 놀아난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함이 떳떳하며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증거불충분으로 책임질 수가 없는 일이라면 매우 불행한 일일 것이다. 목동같은 이단감별사를 공개하고, 놀아난 이들과 단체는 어느 단체이며, 이단규정에 관계한 거짓말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 그러나 미안하지만 ③ 번에 관한 부분의 내용은 삼가를 했음이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여하간에 이 일은 그 진위의 해당 여부에 따라 한국교계에 특정인사나 각 교단에 공개 사과문을 내야 하지를 않는가 ? 요청 고려되는 문제이다.

베뢰아 측에 한상식 목사의 글귀대로,라면 한국교회의 이단규정은 위법적 행위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같은 극단적 베뢰아 측에 발언한 원고의 글귀는 객관성을 결여하는 것이다.

비록 한국교계의 부패성이 개혁이나 갱신을 촉구한다 하여도 이는 한국교인의 공동적 책임하에 새롭게 개선할 부분이며 이단을 규정한 것은 성경의 조명에 의한 것임이 명백하다. 그리고 교계의 성장둔화와 교회의 문을 닫는 그 원인은 영적침체에 따른 제반 비성장요소에 결과로 연구해야 할 문제이며, 이단시비 문제만이 그 근본 원인이라고 단정지어 말 하기는 고려할 문제이다. 왜냐하면 기성교회의 양무리가 미혹을 받아 이단의 집단에 빠지므로 이단은 급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 약5:19,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 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4. 베뢰아운동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이단이 아니다. ( 전문 61-62쪽 확인)

 

① 성경에서 이단이란 기독교 내에서 일어난 거짓선생 교리를 선택하여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고 구원받지 못한 채 멸망하는 무리를 뜻한다. (전문62쪽)

② 역사적인 정통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그것들에 응답할 책임을 갖고 있다. (전문 62 쪽)

③ 베뢰아운동은 오늘의 기독교가 개혁을 필요하며, 초대신약교회의 이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취할 따름이며 정통 기독교를 부인하지 않고 성경밖에 종교를 갖자고 주장하지도 않는다...기독교 복음의 통일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그 통일성을 더욱 확연히 드려내려고 한다. (전문 62 쪽)

이상에 ①②③은 4번의 내용에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베뢰아 운동은 성경이 말하는 이단이 아니다. 과연 그런가 확인하여 보자.

 

① 위 ①번에 내용에 의하면 이단에 대한 정의를 거짓선생의 교리선택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함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멸망자라고 했다.

그러면 베뢰아 측에서 주장하는 이단정의에 거짓선생의 교리선택을 적용하자. 과연 베뢰아 측은 계시론, 신론, 창조론, 인간론, 마귀론등... 모두가 이단사상이며 그의 마귀론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허황된 미혹임이 확연히 정통교단들로 부터 규정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자가 이단이라 함에 적용하자. 입으로는 정통교단의 기본교리와 신앙고백을 따른다면서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이단사상이라는데 문제가 제기되며 이는 마치 양쪽 배에 양 다리를 걸치여 두배를 몰고 가려는 미련한 곡예사의 형상과 같다. 그리고 입으로는 시인하나 근본교리에 정통성을 부인하는 이중성으로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이다.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의 경우를 보자. ‘주여 주여’ 한다는 사실에서 ‘주의 이름으로 불법을 합법화 함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쫒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도무지 모르는 자들로서 그 때에는 많이 있을 것을 예언을 하셨다.(마7:22,23)

이들은 양의 옷을 입은 자들이다. 극히 성경적인 옷을 입은 자이다. 그러나 그 열매가 양이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성도가 밝히 알 것은 그리스도의 숙적인 이단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부인하는 이단자가 있는 반면에 믿는다고 예수님을 주여 주여하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 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나 구원을 받지 못하여 하늘나라에 들어 가지를 못하는 표면적 유대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입으로 기독교의 기본진리 교리체계와 신앙고백을 믿는다고 하면서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의 노선인 그 이단신학사상 열매가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이라 자신이 재림주라 하는 이들중에 유불선 혼합형 사이비 이단의 유형도 있고, 義의 일군으로 거짓선생이(성경공부 유형) 있으며, 이들은 극히 양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나타나 기독교 기본진리를 굳게 믿으면 이라는 식으로 자기 보호색을 강하게 나타낼 것이다. 이단의 유형중에는 은사를 부인하는자, 전인치유와 축사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로,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자로, 신앙고백과 기본교리를 신앙한다며 이단신학사상을 따르는자, 등등으로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는 방법을 총 동원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현혹되거나 빠지지 말아야 한다.

베뢰아측의 이단사상은 자기의 의견을 선택한 것이지 결코 성경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이 정도만 보더라도 이단의 굴래를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종말에 때에는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근거하여 확신을 함에 성경에 이방사상의 혼합과 자의적 선택의 이단사상과 양의 옷으로 가장한 노략질하는 이리의 등장을 조심하여 한다. 이들은 극히 기독교화 되어진 모습으로 교계에 침투하는 짓을 서슴없이 행할 것이다.

이단의 초기발생과 그 유형에 따라 그들은 극히 양의 모습으로 그 옷을 입고 오는 고로 입은 옷이 가장으로 표면적 양의 선전이론이 따로 있어서 필요에 따라 내가 양이다 양이다 할 것이며 자기 기회가 왔다면 노략질하는 이리의 속성인 사단신학사상으로 미혹자들에게 이리 자신의 젖 꼭지를 물리어 이단사상을 빨게 하는 것이다.

이단자의 위장 또는 가장하는 광명한 천사의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이단에 관한 이해의 영적인 수준이 ‘내가 하나님’이다. ‘재림 예수’이다. ‘다른 보혜사’이다. 등으로는 통하지 않으나 정통교리를 위장하여 사단의 신학을 가르치는 ‘전인치유와 축사’의 방법에는 약하며 기복신앙에 물든 자에게는 대단히 ‘어피일’한다는 현실 앞에 서 하나님 중심 신앙의 계시종교인으로 새롭게 갱신되는 수고와 땀 흘림이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단자의 미혹 예방에서 ‘교리의 이중성’을 교묘히 혼합하는 자를 경계하여야 한다. 그리고 전인치유와 축사에서 불법을 행하는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불법이 아닌 성경적은사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② 역사적인 정통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주장을 그리스도인에게 응답할 책임을 갖고 있다. 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베뢰아측의 반복음적 이단신학사상에 대하여 응답할 책임을 복음적으로 수행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다만 교리나 신앙행습이 틀린 사소한 차이점으로 얼-버무리는 식으로 뚜렸하지 않게 이말 저말을 뒤썩어서 슬쩍 넘겨 버리려는 행위는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지적받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성경적인 답변에 합당하게 응답할 책임을 성실히 수행함이 옳은 것이 아닌가 ?

베뢰아 측에서 믿는 표면적 정통성 주장과 그들의 내면적 이단신학사상은 상호 조화되지 않음이 물과 기름 같으며 이는 하나님과 벨리알이 함께 할 수가 없음이다. 이들의 내면적 주장은 정통성을 부인한다. 이를 버리지 않고 정통성을 견지하는 것은 기독교 정통교리를 양의 옷으로 외출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베뢰아 측은 자신들에 이단규정이 성서적인 것이 아니며 교권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나 그들의 이단규정 비판의 근거들은 성서적으로 왜곡된 억지풀이 이단신학사상이라는 사실이다.

③ 베뢰아 운동은 신약교회의 이상을 회복하는 주장을 취하며 기독교 복음의 통일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그 통일성을 확연히 드려내려함이라, 하는데 과연 이 말을 책임지고 있는지 생각하여 보자.

신약교회의 이상이 무엇인가 ?

그 이상을 회복함이라 하는데 베뢰아 측에 주장은 기독교 복음의 통일성에 이단적 사상으로 훼손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훼손을 하지를 않는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며, 그 통일성을 확연히 드려 내려함이라는데 김기동 목사 베뢰아 식으로 표출화 시키는 것이 아닌가 ? 정통 기독교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입으로,만이 아니라 이단적 비복음 내용을 버림이 정통 기독교를 부인하지를 않는 것이다.

정통 기독교의 복음이 아닌 이단신학사상을 신앙생활에 반영하여 그 사상에 지배를 받고 있는데 무슨 변명이 필요한가 ? 베뢰아 측에 창질같은 이단사상인 그 근원을 뽑아내야 기독교 복음에 통일성과 신약교회를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뿌리 뽑지 아니 하고는 다 썩은 집에 페인트를 칠함에 불과하며 죽은 시체에 입히는 수의에 불과한 것이다.

 

5. 다른 사람의 신앙이나 신학에 대하여 판단할 때에는 “무 엇이 다른가 ?” 이전에“무엇이 같은가 ?” 를 먼저 연구 해야 한다. ( 전문63-64 쪽 확인 )

 

① 서로 다른 교리적 관점에서 단지 교리나 신앙행습이 서로 틀리다고 해서 무조건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전문 63 쪽 )

② 베뢰아운동은 기독교 기본진리를 굳게 믿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공통점들을 보지 못하고, 사소한 차이점을 들어 ‘무엇이 다른가’ 하고 비판 하면서 왜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형제를 정죄하는가 ? 이는 형제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마귀 역사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또 교인들의 이동 현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 전문 63 쪽 )

③ 성경해석 차원에서 볼 때 여러 관점들이 있다하여 이단으로 규정을 한다면 잘 못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기독교 기본진리를 견지하며 세계보편교회의 신앙고백을 실천하는 교회나 목회자를 이단이라 정죄하는 것은 이제는 그만 그쳐야 한다...베뢰아 운동의 사소한 성경 해석의 차이점을 문제 삼아 이단시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 전문 64 쪽 )

 

이상에 ①②③ 은 5번의 내용중에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자.

 

① 교리나 신앙행습이 틀리다고 하여 무조건 이단으로 규정을 했다는 식으로 주장함에 있어서 과연 ‘무조건’ 이단으로 규정을 했는가 ? 그러면 베뢰아 측에서 믿고 있는 정통성 기본진리가 무엇인지 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베뢰아 측에서 주장하는 학설에 비교하여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알려야 한다. 정통성 교리를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이들의 교리가 성경에 틀린데도 불구하고 이단규정이 어느 한 두사람의 판단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이단규정을 했다는 말은 억지에 불과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학문적 수준이 어느 개인의 공신력이 없는 판단에 우를 범할 정도로 경솔하다고 보는가 ?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 정통에 대한 주장에 허수아비가 아니며 신학의 논쟁에 쟁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며 성경에 더러 어려운 것에 관한 부분은 억지로 풀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베뢰아 측에 주장하는 교리는 교회사 흐름에서 이미 이단사상으로 명백히 나타난 수준에 것이다.

이단을 연구하는 이들은 성경에 의하여 조명하고 그 검증을 거치여 지면에 공개함이 일반이다. 이러 저러한 소리로 이단사상을 정당화 시키는 일에 시간을 낭비 하지를 말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함이 구원을 받은 성도의 할 일이다.

정상적인 이단규정이 불법이 아니며 이단규정에 굴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단신학사상을 버리지 않으며 고집함이 불법임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무조건’ 이단으로 규정을 한다면 이는 분명히 잘 못이며 정신병자 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도전하는 이단 규정에 있어서 무조건이라는 말은 시언찮은 소리에 불과하다고 본다. 물론 카도릭의 교권이 개혁의 세력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불미스런 불법이 있었으나 오늘에 한국교계에 나타난 이단의 규정은 교리나 신앙행습이 이단신학사상에 근거하는 주장을 신앙함에 그 결과이며, 극히 당연한 귀결이며, 무조건이 아니다. 이단을 이단으로 규정함이 잘 못이 아니다.

② 베뢰아 측에 이단규정이 사소한 차이점에 다른 부분에 의한 것으로 기독교 기본진리를 굳게 믿는데 왜 이러한 공통점은 보지를 못하는 결과로 이는 형제간에 불화를 일으키는 마귀역사 내지는 교인들의 이동 현상으로 봄에 있어서 이들의 주장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

물론 교인이 이동하는 일들이 있어서 마음이 상할 수가 있으며 마귀의 역사로 불화할 수 있다고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단의 규정은 마귀의 역사에 사소하게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교회보호 차원에서 대내외적으로 명분이 분명한 중대사이다.

베뢰아 측에서는 기독교 기본진리를 굳게 믿는 다고 하는데 베뢰아의 주장과 학설은 무엇을 말하는가 ? 이는 이중성인 것이다. 왜냐하면 정통교리는 베뢰아 주장을 용납을 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기본진리를 굳게 믿는다면 베뢰아 주장을 분토와 같이 버려야 한다. 진리를 굳게 믿는다는 자가 어떻게 이단의 사상을 굳게 잡고 주장을 하는가 말이다. 베뢰아 측에 대한 이단의 규정이 사소한 차이점이 아니며 기본진리를 벗어난 결과이며 마귀의 역사가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일 뿐이다.

교인이 이동을 했다고 베뢰아 아카데미 출신 평신도들이 능력을 나타냄으로 오는 갈등의 원인과 사소한 차이점에서 할 일이 없어 이단을 규정하는 마구잡이 잔챙이로서 품위가 낮은 사람으로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단의 규정에 분명한 근거가 있음에도 자신들은 이를 망각하고 무조건에 당한 자라고 생각함이 잔챙이가 아닌가, 사료되지 않을까 ? 염려가 된다.

③ 베뢰아 운동의 사소한 성경해석의 차이점을 문제 삼아이단시 하는 것은 성경해석 차원에서 모순이라 아니 할 수가 없어서 이같은 이단의 정죄는 그쳐야 한다는 주장에서 이들의 말대로 과연 그런가 ?

이단의 규정은 성경해석에서 그 차이점을 발견하는 일이 정상적이며 모순이 아니다. 사소한 차이점이라 문제를 삼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 아니며 그 사소함이 이단의 사상일 때에 이는 독한 비상으로 함축된 ‘엑기스’ 가 되는 것이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성경해석상의 차원에서 모순이란 말인가 ?

베뢰아 측에서는 기본진리를 견지함이 굳게 지키는 지지 입장인지 아니면 다만 살피는 입장인지 그 소재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굳게 지키는 견지(堅持)라면 성경해석상 사소한 차이점이라는 이단신학사상이 용납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견지(見地)의 입장이라면 이단신학을 버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살피는 입장이라면 이는 필요에 의한 수단에 도구적 입장에 기회주의 자임을 벗어 날 수가 없다.

기독교 정통진리를 굳게 믿는다면 이단신학사상을 사소한 것이라 하여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다지 대수롭지 못하게 여기어 교계를 어지럽힌다는 것은 그 인격이 의심스러운것 아닌가 ? 하치않은 차이점이라는 것을 복음에 시각으로 보자 이 눈이 열린자는 결코 작고 적은 것이 아니며, 이단사상에 매인 시각에서는 극히 당연하다고 믿기 때문에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고 과소 평가를 할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짐을 안다면 이단신학 사상의 교훈을 적은 누룩이라 보는 시각은 사단적 사고에 근거한 발상이라고 보아지는 것이다.

베뢰아 측은 이단의 규정을 벗어 나려고 다른 사람의 신앙과 신학을 판단함에 무엇이 다른가 이전에 무엇이 같은가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고 그 선후를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럴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과 신학의 판단에 영적인 수준에 따라 판단의 선후는 달리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무엇이 같은가를 연구함에 선행이 된다는 원칙은 불문율(不文律)에 따른 성문법이 아니다. 무엇이 같은 것인지 아는 사람은 무엇이 다른 것인지 부터 연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에 이단규정에 연구를 위하여 상호보완하는 절충방법이 좋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베뢰아 측에 입장을 고려한다면 왜 이들은 무엇이 같은가를 원칙으로 내 세우는가 ? 이는 같은 것이라는 동질성에 이단이 아니라는 고정적 관념에 매이게 하는 시도이며 이단신학사상을 사소한 것으로 무관심 속에 속이는 수법이라 추론할 수가 있다. 에덴의 동산에서 부터 현시에 이르기 까지 사단의 존재는 항상 사소한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말씀에 변질적 요소를 더하거나 빼는 짓을 전문으로 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이점에 성도는 유의하여 사단의 간교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베뢰아 측에 이단규정 근거는 사소하거나 하찮은 것이 아니다. 복음적 해석차원에 여러 가지 관점을 벗어난 이단신학사상이라는 점을 알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는 교회보호차원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어야 함이 계속 유보하는 것이다.이것을 그치게 하는 운동은 그리스도의 숙적이기 때문이다.

 

6. 베뢰아 마귀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발힌다.(전문64-65 쪽)

 

① 베뢰아운동 혹은 김기동 목사와 연관된 “베뢰아 이단”이란 ‘성서적으로 본 이단’이 아니라 ‘교권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단’ 이다... 당시에 문제 제기가 되었던 김목사의 이설이라면‘귀신의 불신자 사후존재설’과 ‘아담 이전에 인류존재의 문제’이다. 그러나 김목사의 가르침이 기독교 기본진리와 배치되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전문 64 쪽)

② 김기동 목사 본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장이요 학설이라고 주장해 왔다....마귀론에 대한 이러한 자신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장하는 학설보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이며 과학적인 학설이 제시되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 바도 있다. (전문65 쪽)

③ 그이 견해로는 오히려 귀신이 불신자 사후의 영적 존재임을 발견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많다고 주장한다.(전문 65 쪽 마귀론 상,중,하 및 베뢰아국제진흥원 연구자료집들 참조를 요망함)

 

이상에 ①②③은 6번의 내용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베뢰아의 마귀론에 신학적 입장에 타당성 여부를 확인하자.

 

① 베뢰아 이단은 성서적으로 본 이단이 아니라 교단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단이며 김목사의 가르침은 기본진리와 배치됨이 전혀 없다 라는데 과연 그런가 ?

베뢰아 측에 이설이 성경에 전혀 배치 되지가 않는가 ?

라는 이 사실을 누구나 다 인정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다 인정하는 이설에 대하여 한국교계 각교단이 인정하지를 않아 이단으로 규정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누구나 다 인정을 한다는 말이 공신력이 있는가 ? 누가 베뢰아 식을 다 인정을 한다는 말인가 ? 이는 어이가 없고 허황된 소리인지라 뭐가 뭐 까먹는다는 소리 같이 어처구니 없는 소리이다.

베아뢰 측에 이단규정은 성경에 의한 조명의 결과이다.

교권에 의한 침례교단의 횡포가 아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보자.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성서적으로 본 이단이 아니라니’ 각 교단이 베뢰아 측에 주장과 학설에 관한 이단규정 내용들을 공개하여 알려야 할 것이다.

베뢰아 측에 신앙인들이여 ! 터무니 없는 발설에 속지 말 것을 바라며 이미 이단규정으로 지적받고 있는 내용을 퇴치하자고 개혁의 소리를 높이자. 이단의 사상으로 순수한 신앙인들이 시달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본교리를 믿는다면 문제가 아닌데 이단사상이 무엇이기에 갈등할 이유가 있는가 ?이로 말미암아 인간관계가 묘연하여 지고 적대감정으로 불편함을 생각하니 참으로 웃지 못할 노릇이 아닌가 ? 문제의해결의 열쇠는 베뢰아 마귀론을 비롯하여 왜곡된 이단의 사상을 버리는 일이다. 이들은 김기동 목사의 이설에 문제를 제시를 하면서 그의 가르침이 기독교 기본진리에 배치되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인정할 수가 있는 내용이라는 말은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속 보이는 소리에 불과하다. 그러면 베뢰아 측에 제기되는 이설이 관계가 없다는 말인가 ? 그러나 아래의 ② 의 내용을 보면 김기동 목사는 자신의 주장 그 이상에 학설이 제시가 되면 수정할 것이라는 의지는 곧 변함이 없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그 이상에 학설이 나와야 할 이유가 복음적 입장에서 볼 때에 없으며 있다면 유사변종의 이단 혼합사상이 나타날 가능성에 사실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정할 의지의 표명은 다만 가상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② 김기동 목사는 자신의 주장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장이요 학설이며 그 주장 이상으로 학설이 제시되면 수정할 것이라는데 이는 참으로 자신의 주장이요 학설일 뿐 이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이라는 이들의 말에 신실성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단시비의 논쟁시에 그는 자신의 주장과 학설일 뿐이라 약화를 시키며, 기본교리를 굳게 믿는 다면서, 반면에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것에 대한 문을 활짝이 열어 놓은 듯 하나 성경의 교훈에 자신의 주장과 학설을 굴복 시키지 아니하며 여전히 이를 행함은 사단적 교만에 고착성인 것이다. 성경이 아니요 하는데, 자신의 견해인 학설보다 더 성경적인 것이 무엇이 필요하며, 더 신학적인 것이 요구되며, 더 과학적인 학설이 제시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 성경이 아니요 하면 이단신학사상은 그만 두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 본래의 의미에 불복하며 그 이상에 견해를 제시 요청하는 행위는 성경을 벗어난 이단사상에 편견적 고집인 것이다.

자신의 견해 주장과 학설이 복음이 아니면 이를 주장 하거나 진리로 절대화 시키지 말아야 한다.

귀신을 축사하는 일이 종말의 때까지 이루어 져야 한다해도 성경에 합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야 한다. 이것은 극히 원론적인 것이다. 성경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냈으나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베뢰아 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귀신을 축사하는 것도 성경적인 방법이 있고,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의 불법적 축사가 있다.

③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영적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가 성경에 많다고 주장하는데 과연 그런 것인가 ?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영이라면 사람의 영이 귀신의 영으로 가변을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이 귀신의 영이 된다니 웃지 못할 노릇이다.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육신부활을 하는데 귀신인 영의 존재가 부활을 한다는 성경의 교훈이 없을 뿐 아니라 이는 귀신 부활을 만들어 내는 논리의 모순에 스스로 빠지는 어리석음이다.

성경 어디에도 불신자의 사후 영적 존재가 귀신이라는 근거는 찾아 볼 수가 없으며 이는 베뢰아 마귀론 주장과 학설에 불과하며 성경에 의하여 수정해야 하는 비복음이며 성경이 아니다. 이같은 주장은 민간신앙에 보아지는 무속적 혼합에서 발견되는 귀신론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불의를 행하면 수호천사가 가변하여 미혹의 영이 되어 다시는 환원되지 않는다고 이같은 해괴한 소리를 주장을 하는데 이것이 복음인가 ?

 

7. 베뢰아 운동의 신학적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의도이다.(전문 66-67 쪽 )

 

1) 하나님의 의도에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

 

①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기에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고,기도하고, 찬양하고, 헌신하게 한다.

② 성경의 권위를 일기에 성경 읽기에 힘쓰고,성경을 가르치기에 힘쓰고, 성경을 사랑한다.

③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한다.

 

2) 베뢰아 아카데미 하나님의 의도 삼중구조를 제시한다.

 

① 하나님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셨다.

② 아들이 고난의 죽음으로 사단을 멸하려 하셨다.

③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늘 보좌에 오르셔서 성도들의 처소를 예비하시고 성령을 보내시여 인류를 구원하신다.(요3

:16).

이상에 7번에 1),2)의 내용은 전문 66-67쪽에 기록에 일부이다.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사람은 하나의 그 외도에 복종하게 되고 영생을 얻어 새생명이 풍성한 생활을 한다. 라고 그 의미를 밝히는데 영생을 얻는 일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다. 그 믿음에 내용은 로마서 10:9-13절이이다. 구원 그 후에 예배, 기도, 찬양, 헌신이 따르며 성경을 사랑하고 성령의 은사로 자신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도 불법적으로 귀신같이 믿어서는 아니되며, 성경 말씀을 그대로 받지 아니하며 자의적 해석의 주장을 선택하여 이를 가르쳐 교사를 만든다면 이는 교회에 합당한 교사가 아니며, 귀신을 좇아 낸다 하여도 불법 행위로 이방인 민간신앙을 혼합한 방법으로 역사를 하여야 소용이 없으며, 후일에 주님을 향하여 자신이 이렇게 행 하였다고 소리를 쳐도 도무지 모르는 관계라는 사실이 있음을 알고 크게 경성하고, 주님이 아는 자로서 축사를 하여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意圖) 3중 구조라는 내용에 하나님의 아들 후사 세우심, 사단을 멸하려 하셨다. 인류를 구원하신다.라고 하는데 그 향방이 불충분하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귀신축사함에 종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은 하나님의 근본 의도에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함이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단적 발언이다. 하나님의 종극적 목적인 의도에 전인치유와 축사는 종의 신분에 불과하다. 절대로 근본 의도인 주인의 자리에 오를 수가 없는 것이다. 표적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게 함에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인 행위의 종극적인 목적과 장차 하려는 계획은 무엇인가 ?

에베소1:4-6 절로...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인간을 향하신 섭리는 ‘그리스도안에 예정하사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여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시며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미리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심이다.(롬8:29) 그리고 그가 영광을 받으시려 함이다. 이 일을 위하여 여러 가지 환경섭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합당한 의지에 결단인 복음에 근거하여 실행을 하신다.

인간 피조물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이 영광을 위한 창조이다. (골1:16, 사43:7, 롬8:29,30, 고전10:31, 계22:12)

 

8. 하나님의 의도와 관련하여 신앙생활의 성장 단계를 아동기,청년기,장년기로 나눌 수 있다. ( 전문67-69 쪽 )

 

① 청년들에게는 악한 자를 이겼다 하였다. 죄사함을 얻고 마귀를 이긴자가 청년이다.‘죄사함을 얻었다’,‘마귀를 이겼다’ 할 때에 이는 의미상으로 현재 완료이다.

② 어찌 죄사함을 받은 우리가 예수를 모른다는 말인가 ? 하고 반문할지 모르나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태초에 계신 예수’를 안다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베뢰아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의도’를 가르친다.

③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해도 구원받을 수 있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이상에 ①②③ 은 전문 8번의 내용중에 발췌한 것이다.

위의 견해 주장에서 그 의미에 불확실성을 확인하자.

 

① 마귀를 이겼다 함이 현재완료인 고로 하나님의 자녀는 그 누구나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었음이니라,에 해당하는 것이다. 청년들에게만 해당되는 일로 한정을 짓는데 이에 협의적 한정을 짓지 말아야 한다. 1요2:14,15절 부분에 청년들에게 이기었음을 교훈했음에 해당하는 것이지 아동기나 아비들에게 해당이 됨이 아닌 것이 아니다. 특히 유의 할 것은 마귀,귀신에 공포증에 걸린자 같이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②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태초에 계신 예수를 안다 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말하는데 이는 예수를 모른다는 말을 삼가야 한다. 예수를 모르고 죄사함을 받는 법이 없으며 아비들만 태초에 계신 이를 안다는 의미에서 자녀들은 예수를 모른다는 말은 문제를 제기 한다. 그러므로 광의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 그를 아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을 지라도 태초에 계신 예수를 알수가 없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 찿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하나님의 의도를 창출하지 말아야 한다.

③ 하나님의 의도를 모른다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라고 하는데 전문 66쪽에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외도에 복종하게 되어 영생을 얻는다라고 반대어 (反對語)를

사용하고 있다. 구원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9.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고백은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전문70-71 쪽)

 

그러면 김기동 목사의 신앙고백은 무엇인가 ?

「 저는 성경은 영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무흠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며 또 신약성경은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본이 됨을 믿으며, 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으며, 저는 예수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믿으며, 저는 성령의 인치심과 인도하심을 믿으며, 저는 구원이 오직 예수의 피로 구속하신 은혜로 받음을 믿으며 도 신자의 회개와 거듭남을 믿으며, 저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믿으며, 저는 의식에는 침례와 만찬(성만찬)만이 있음을 믿으며 또는 (안수받은 직분은) 목사와 집사만이 있음을 믿으며,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것을 믿으며 도 성도의 부활과 영생을 믿으며 의인은 영생에, 믿지 아니한 죄인은 영벌에 들어 갈 것을 믿습니다.」

 

이상에 내용으로 보건데 그를 이단이라 규정함이 무색하할 정도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내용을 통해서 그가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한 것이 표면적 선전 이론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에 몹시 놀라게 될 것이다.

그는 성경을 무흠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나 ‘현재 성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김기동 영원한 관계 pp. 68-69),또한 오늘에 성경에는 성경과 성서가 있는데 성경은 계시이기 때문에 가감할 수가 없지만 성서는계시인 성경을 증거해 주는 것으로 가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성경은 모세5경과 공관복음으로 8권이며 나머지 58권은 성라고 하였다.(베뢰아 9기생 강의 녹음 테이프24-1) . 신약성경은 성도의 신앙과 생활에 본이 됨을 믿는다는데 구약성경은 생활에 본이 아니 되는가 ? (고전10: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는데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은 천사들이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상p.112),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를 천사를 얻고라는 말과 동격이라고 하여 모든 부분에서 천사일 뿐이지 성령은 허수아비와 같다.(상담소자료집1 사이비이단 연구 1992,10,30

예장통합) 그 뿐 아니라 양태론적 해석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으나 생략을 하기로 하자.

양의 옷을 입은자의 신앙고백이 아무리 성경에 이상을 주장을 하여도 이는 양의 옷으로 신앙고백 노선임을 알아야 한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미련한 다섯처녀를 보라 그들이 믿는 신앙의 범주는 주의 사람으로 주장을 해도 주님은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선지자 노릇과 귀신축사와 많은 권능을 주의 이름으로 주여 주여 했다고 주장을 하여도 주님은 도무지 모르는자 일 뿐 아니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매우 심각한 것이다. 이같은 불행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지 아니하고 귀신같이 믿는 지적신앙의 결과요 속이는자 마귀에게 완전한 속임으로 이용을 당하고 어리석께 주님을 향하여 항거하는 불법적 모습이 아닌가 성경에 없는 방법을 합법화 시켜서 주의 이름으로 은사 행사를 한다는 자들은 지금 이 시간이라도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시험을 하고 구원의 믿음에 바르게 서서 불법적 자의적 방법이 아닌 성경에 순종하여야 한다. 무엇이 나타 난다고 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착각에 사로 잡히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믿음의 말씀이 아니면 버리라 .

표면적 신앙고백의 신실성은 그 내용과 자신의 주장이 반대개념의 설(說)로 대립이 되는 주장이라면 이는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겉은 양의 옷이요 속은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것이다. ‘주여 주여’ 하며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 하고 후일에 주님이 도무지 모르고 알지 못한다는 불법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베뢰아 측에 이단설은 세계보편교회의 신앙고백 실천한다 + 베뢰아 주장과 학설 <=> 성서적 이단이 아니다. 이같은 수리문학논법은 그 합리적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 정통 신앙고백(양의 옷/ 껍데기 / 겉) + 베뢰아 주장 학설(노략질하는 이리 속성/ 알맹이 / 속) +< = > 양 + 이리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이다. ↔ 그러므로 기독교화 되어진 양의 너울을 쓴 이단이다.

 

맺음 말

 

성경에 나타난 초대 베뢰아 사람들은 성경을 닮는 일에 모범을 보였으나, 한국에 있는 베뢰아운동은 성경 닮기 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신앙고백을 하지 말고 주장과 학설도 성경에 합당해야 한다. 베뢰아 측이 이단의 규정을 면하는 길은 이단신학사상의 주장과 학설을 버리고 성경의 기본교리만을 믿음으로 이행함이다. 이를 버리지 못함은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 하는 이리인 증거이다. 왜 겉과 속이 다른가 ?

양은 양의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본래 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리의 경우는 노략질을 위하여 양으로 위장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양의 옷을 필히 입어야 한다. 그 가장의 옷은 바로 기독교의 기본진리 체계와 신앙고백이다. 노략질하는 이리의 속성인 이단 사상을 버리지 아니하고 정통성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생명이 없는 양 가죽에 불과하다.

초대 베뢰아 사람들이 한국에 베뢰아 측에 이단사상을 믿었던 신사적인 성경에 근거가 있는가 ? 눈을 크게 뜨고 보아라 사실이 그러한가 상고하여 보라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뢰아 운동은 성경닮기운동인가 ? 스스로 결론을 지어 보자.

 

1996, 12,13 금 18:10 집필실에서

 

베뢰아의「반박 보도문」그 허구성

베뢰아 운동은 과연 성경 닮기인가 ?

 

글 / 원 문 호 목사

임마누엘 제자성장 연구원 / 院長

[이단분별 제자화 운동 / 본 부장]

 

 

「반박 보도문은 베뢰아 선전 이론에 불과」

 

「베뢰아국제진흥원 원장」한상식 목사는 필자의 글 “베뢰아 운동은 성경 닮기 운동인가 ? 아닌가 ? 그 허상을 벗긴다”는 내용을 근거로 삼아 한국교회 신문 1997, 6, 15-7, 27 (5)회차 반박을 했다. 그의 글은 사실 ‘반박 보도문’이라기 보다는 「베뢰아 선전이론 홍보」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로 인하여 파급되는 악 영향을 우려하여 본인은 그들의 선전 이론으로 말미암는 진리의 혼돈을 예방하고 한상식 목사 「반박 보도문」의 허구성을 밝히는 공익적 사명 수행임을 밝힌다.

 

「 선전 이론 감언이설에 속지 말자」

 

먼저 독자는 반박문에 관련한 한국교회 신문 편집자 주 내용에 “이 반박 보도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적시한다”는 신문사 신앙의 정통성 입장을 기억하고, 이단의 선전 이론은 기독교 정통성 주장에 조화되지 아니하는 ‘양의 옷’으로 위장임을 알자. 그러므로 성도는 그들의 ‘다른 복음’을 감추는 ‘감언이설’인 선전 이론에 속지 말아야 한다.

베뢰아 측에 알린다. 각 교단이 이단의 규정으로 지적한 내용에 대하여 분토같이 미련 없이 버리지 않는한 베뢰아 의 선전 이론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다른 종교의 흑백 비판은 종교의 자유」

 

이단을 향한 진리수호적 사명의 글은 신분 여하를 무론 하고「변별종 이단의 신학사상」을 주장하는 자에게 고린도 후서10: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는 복음 사역 앞에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비복음 주장에 어리석은 고집을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단은 그 사상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이단의 이론을 파하는 글에 대한 반응이 기본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자행한다. 그리고 성경에 합당한 기고에 대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언행 심사와 훼방적 행위의 불손이 일반이다. 이단의 사상이 아니고 진리라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단의 주장은 당연히 지상에 공개되고 성경의 조명으로 흑백을 가리는 비판은 당연한 것이다.

국가의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에는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자유도 포함되어 있다”“다른 종교를 비판하며 다른 종교 신자에게 개종을 권고하는 선교의 자유도 허용된다며 언론 출판에 의해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경우에도 일반적인 비판보다 훨씬 높은 강도로 비판해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이는 이단에 대한 대법원 1996, 9, 10일 판례이다. (한국일보 1996, 9, 11일자)

성도는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비판이나 판단이 아닌 경우 성경이 아닌 것은 아니라, 옳은 것은 옳다, 할 수 있어야 죄를 면하는 것이다. 이단은 성경으로 이단성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아주 능하다. 그들은 표면적 선전 이론 주장을 긍정적 부분으로 암시하여 추종자로 하여금 자기 체면에 걸리게 한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지 간에 그 결과는 이단성을 수긍케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단의 자의적 해석은 마본주의 신학」

 

성경의 해석은 말씀을 사모하는 자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다르다. 이단은 성경에 100% 통달을 했다느니 아니면 성경을 0000독을 했음을 자랑을 하는데 그 가 주장하는 내용이 이단의 사상으로 가득하여 정죄를 받음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 사단의 하수인으로 성경을 남용하는 사단의 포교 전략에 매인 자이다. 어떠한 사람은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사단이 개입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단이 성경으로 시험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이단들 치고 성경을 사모하지 않는 이단이 있는가 ? 이단의 연구에서 확인되는 것은 교주들은 성경 통달이 마귀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본주의(魔本主義)이다.

그러므로 이단에 관계한 글로 그들을 옹호함은 자신의 선택으로 자유하나 이에 명심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이단의 그럴듯한 정통 신앙고백 선전 이론을 보심이 아니라 그들의 이단성 변별종 주장이다. 혹이나 옹호하는 글로 대변자가 되려면 자신이 과거에 소속된 기성교회 복음 정신과 이단자의 주장을 구분할 수 있어야 신인 관계에 죄를 면하는 것이다. 자신의 글과 얼굴이 이단자 주장에 보호색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배뢰아 대변가 민병소 목사 양심선언 !」

 

이단의 집단에 무리는 유기자를 비롯하여 교회에서 이단의 미혹을 받아 그 곳에서 젖줄을 빠는 분이 있다. 미혹을 받은 羊 무리는 이단 분별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비록 이단의 집단에 빠졌다 하여도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그들이 이단으로 지적을 받는 교주의 탈복음적 입장에 변화를 촉구하는 ‘이단 사상의 폐기를 축출’하는 사명적 기수가 되어야 한다.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면 이단의 규정에 동의하고 이단성 폐기를 촉구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혹의 집단에서 나올 수 있는 결정적 기회가 있음에도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의 확증이 의문시 된다. 그 뿐 아니라 끊임없이 이단의 사상을 버리지 않으며 그를 위하여 변호하는 보호색 글에 몰두하는 지도자 및 일반 성도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이단자의 같은 류(類)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사람은 한때 오류적 행위가 가능하다. 구원을 받은 자라면 그곳 집단에서 개혁의 기수로서 ‘양심 선언’을 하고 나오는 것이 극히 정상이다.

한국 베뢰아가 이단이라는 이해에 그 좋은 실례가 있다. 그는 베뢰아 이론가로 대변한 ‘민병소’ 목사이다. 그는 양심 선언을 하고 기성 교회로 돌아 왔다. 참으로 다행한 복을 받은 분이다. 그가 비록 무지몽매한 오류를 범했으나 회개의 무릎을 굻고 양심 선언의 결단으로 돌아온 그에게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아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한때 베뢰아 김기동 목사를 철저히 대변한 분이다. 김기동 목사는『“민병소 소장의 주장에 의하여 이단적 요소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자신의 ‘예언자적 성격’에 의하여 판단된 것으로 나타내고 있을 만큼 김기동 목사는 인정을 받고” (베뢰아 귀신론 비판 33쪽), 있었는데 “베뢰아 이론가 민병소 목사의 ‘양심 선언’ 베뢰아 귀신론은 비성경적입니다.” 그는 “김기동 목사의 ‘베뢰아 아카데미 귀신론’을 변호하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김 목사가 설립한 서울 남침례신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1년이란 세월 동안 베뢰아 귀신론을 옹호해 온 민병소 목사는...베뢰아 귀신론 관련 저술의 폐기와 아울러 무효임을 선언했다.” 또한 “어설프게 습득한 종교학이라는 미명 아래 ‘베뢰아 아카데미’를 변호하는 무지몽매한 오류를 범해 감리교 선배 목사님과 한국 교회에 피해를 입혀 드린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며 양심을 선언 하고자 합니다.”(현대종교 1994, 3월호 60.62쪽),』 베뢰아를 대변한 이론가 민병소 목사의 양심 선언 사건은 이성적인 판단을 가진 분이라면 그에게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베뢰아의 이단임은 明明白白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라 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몽매한 분이 아닌가 ?

한편 베뢰아에 대하여 ‘베뢰아는 이단이다’. 반면에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베뢰아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옹호한다. 어떤 이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 모오한 발언으로 탐탁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러한 형편은 미국 한인 교회 뿐만 아니라 국내 입장도 그러하다. 이원열 목사 저서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뢰아는 이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모두 베뢰아의 김기동이 잘못 가르치는 성경 공부를 무조건 성경에 있는 진리로 받아 들여 맹신 맹종하는 추종자들로서 베뢰아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 (베뢰아 이단 연구 19쪽)

 

「베뢰아 사실 현상학은 이단성의 열매」

 

본인이 연구한 결론은 김기동 씨의 베뢰아 운동은 성경의 근거를 빙자하여 샤마니즘 민간신앙 귀신론의 실재적 현상에 자의적 성경의 해석을 접목시킨 주장이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과 관계가 없는 악령의 역사에 따른 현상학적 이론이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자에게 베뢰아의 이단성을 지속적으로 오염을 시키고 있으며, 여기에 신앙고백이라는 ‘양의 옷’인 선전 이론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베뢰아 하나님의 의도라는 홍보 성향에 글에서 주장하는 가시적 타당성과 그 배후 이단 사상에 따른 허구성을 예리하게 주시 그 비본질을 밝힌다.

 

1. 반박보도문 < ① 베뢰아 운동은 ‘하나님의 의도’ 신학을 주장한다. 에서 그는 과연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가 ? (1997, 6, 15 일요일 제25호)

 

첫째로 : ‘이단 사냥’, 이제 그만 주장 < 반박문

 

한상식 목사는 한국교회 이단의 규정에 대하여「 “중세기 마녀 사냥 같은 이단 사냥은(?) 이제 중지되어야 한다.”」

 

「 베뢰아 이단의 규정은 스스로 자초 」

 

베뢰아 이단의 규정에 대한 「“여타 교단들은 이들의(원세호 목사, 최삼경 목사) 자의적인 이단 정죄에 의존하여 베뢰아를 이단이라 정죄 하였다”」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일방적인 정죄가 아니다. 원인의 제공을 베뢰아가 먼저 했으며, 근거가 없는 이단의 정죄가 아니라, 김기동 목사의 서적과 기타 자료에 근거한 성경의 조명에 따른 검증의 결과이다. 한국교회 각 교단이 규정한 심도있는 자료에 증거를 심층 분석한 것이다.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여러모로 권고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인내의 사랑은 아랑곳이 없이 그는 최후의 기회까지 스스로 거부를 하였다. 그런고로 그가 이단으로 파문되는 결과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베뢰아 이단의 규정이 교권의 횡포가 아니다. 귀신론에 대한 오해나 그 결과에 따른 물의는 더욱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뢰아가 한국 교회에 끼친 악의 영향으로서 이단의 사상에 따른 영적인 횡포에 대한 반성은 커녕 끊임없는 도전으로 변명하며 돌이킬 줄 모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픈 노릇이다. 여하간에 이단의 사상으로 규정된 탈 복음은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도 그가 이단으로 규정받은 사실을 버린다면 성경이 그를 정죄할 것인가 ? 문제는 이단의 판정 기준인 성경 그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 이단의 고착성은 그 자체가 그를 이단으로 규정함이 당연시 되는 것이다. 이 일은 인간이 하나님 위치에 서서 정죄를 한다는 발언을 삼가하자. 성경이 이단의 주장을 규정할 뿐이다.

혹이나 신학적 견해의 차이에 관계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억울한 것 같은 생각이라면 그것은 각 교단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베뢰아 이단의 규정은 신학의 견해 차이로서 상대적인 교리에 따른 이단의 논쟁이라 믿는다면 그는 참으로 무엇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자로서 우매 무지한 발상이다. 그는 정말로 불쌍하다는 기분이다. 하루 빨리 지금이라도 성경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함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그리고 고얀히 사람을 교권으로 생매장을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성경 그 자체가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때때로 상대적 이단의 정죄가 신학의 문제로 제기되는 경우가 있으나 베뢰아 측은 예외이며 그들의 이단의 신학 사상은 성경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것이다. 이단의 연구에서 그들은「베뢰아는 무엇이 다른가 보다는, 같은가를 알아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하나 필자는 무엇이 다른가 ? 를 연구함이라 주장한다. 왜냐하면 다른 그것이 ‘변별 종’으로서 이단의 규정을 벗어 날 수 없는 이단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포장을 하여서 그럴싸해도 그 속에 배설물이 들어 있다면 배설물의 포장일 뿐이다. 포장이 좋다고 찌꺼기가 변하여 좋은것이 될 수 있는가 ?

 

「 이단규정의 해제는 이단성 폐기가 최선 」

 

★ 김기동 목사 「베뢰아 이단의 규정」은 아래와 같다.

 

① “1987, 9, 30 기독교 한국침례회 제77차 연차총회에서 제명 직전에 탈퇴”하였다. 그의 탈퇴 선언서 내용은 “본인은 침례교 이상과 주장을 찬동함으로 26년간 몸 담아 온 본 교단을 이의 없이 탈퇴함을 선언합니다.” ( 기침 자료 중에 ‘무엇이 다른가 ?’ 77, 39 쪽)

② 1991, 10, 5일자 기독신보에 기록은 예장합동 제76차 총회시(1991, 9, 24-27)에서 김기동 씨를 이단으로 규정 그 연구 위원회 보고시 요약이 특별 기고로 [ 5 ] 면에 김기동 신학은 “이단” 귀신은 불신자의 死後存在 주장, 모세오경, 공관 복음만 성경...나머지 성서 가감 가능 궤변도, 인간은 사단 정죄위한 도구 정의, 범신론적 체험주의 신학...“이단규정”당연하다.

③ 예장통합 상담소 자료 1 “사이비 이단 연구”- 총회 사이비 이단대책위원회 보고서- 1992, 10, 30 (사이비 이단문제 상담소 운영 위원장 박종순 ) 김기동 씨 (귀신론) 7-9쪽에 참고 자료에 의하여 기록한다.

④ 예장고신 “유사종교 연구”󰊱󰊲󰊳󰊴 집합본 총회 유사종교 연구 위원회 편 1992, 9, 15일자 발행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에 대한 비판’( 129-145 쪽 ) 연구 위원 오성환 목사 결론은 “이상을 비교하여 대조 설명하였는데 분명히 성경을 토대한 주장이 아니고 경험론을 토대로 하고 무교에 근거하고 있으며 개인의 생각을 주로 하여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성경을 억지로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고 있고 성경의 뜻과는 다른 주장을 내 세우고 있다. 교인들은 현혹되지 말기를 바라며 연구집이 조금이라도 도움되기 바란다.”(145쪽)

⑤ 기독교 대한감리회 베뢰아 이단규정 자료 “기독교 세계” 91년 9월 758호 14쪽 “이단사상 미혹을 경계하라”에 “김기동이 베뢰아 아카데미...를 이단으로 정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힙니다. 1. 김기동이 주장한 계시론, 신론, 창조론, 마귀론은 모두 이단 사상이다... 이중 아담론등은 명명백백한 이단 사상이다...그의 마귀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황된 미혹이다.”

⑥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출판부 사이비 이단 대책 위원회 편 1993, 3, 20발행 “구원이 있는가 ?” 141-150쪽에 제11부 ‘베뢰아 아카데미’를 비판한다.

 

베뢰아 측에 한상식 목사는 이단이 아닌 김기동 목사를 원세호 목사가 이단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모자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조명과 검증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고로 베뢰아 측은 무엇이 이단으로 규정을 받는 문제로 제기가 되는지 자기의 발견이 무엇보다 급선무 하는 것이다.

 

목사가 밥이나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심심풀이’로 이단의 사냥이나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망상을 떨지 말아야 한다. 이단의 규정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수모와 핍박을 감안한 순교적 사명 수행이다. 그런고로「이단 사냥 이제 그만」이라는 구호나 외치지 말고 바른 길이 무엇인지 권고할 때에 스스로 돌이킴이 자신을 비롯하여 그 이웃들이 함께 바르게 사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이단의 규정에 관계한 사명자에게 고맙게는 여기지 못할 망정 끊임없이 베뢰아 귀신론은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발상은 그 속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 바람직한 처신이 아니다. 이 일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바르게 고치라는데 기분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 한국은 ‘이단의 천국’ 이단자 색출 계속」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이단 사이비 대책 위원회」 ‘한국 이단 사이비 집단 종파 현황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 70종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연구소」 1997, 7, 6 일자 교회연합 신문에 ‘박영관’ 목사는 “현재 우리 나라에 75 종류의 다른 복음이 있고 이것을 추종하는 세력이 2백만에 이른다”고 그 실상을 공개하고 “이는 대부분 기성 교회에서 미혹 당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 뿐 아니라 「현대종교」기록에 의하면 자칭 예수가 37명, 자칭 하나님 12명, 그 이상이라고 공개하는 실정이다. 이같이 혼란한 영적인 상태에 놓인 한국 기독교를 각별히 인식을 한다면, 감히 ‘이단 사냥 이제 그만’ 이라는 말을 진리수호의 사명을 수행하는 자에게 적용하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현재 한국교회 영적인 상태는 ‘이단 사냥’ ‘이제 그만이 아니라’ 이단으로 부터 교회의 건전한 보존을 위하여 이단 분별의 사명에 따른 그 기능을 강력하게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중세시대 암흑기에 마녀 같은 이단의 사냥’은 중지됨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한국교회 각 교단이 행한 이단 의 규정이 마치 중세기에 이단의 사냥이라고 동일시 보는 시각은 동의할 수 없으며 이는 다만 영 분별의 수행을 도전하는 사단적 행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단을 옹호하는 자신이 그들의 사상을 용인하는 동일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 왜 원세호 목사가 나서지 않는가 ? < 반박문

 

이 말은 ‘한국교회 평신도 협의회’가 「베뢰아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공청회(1996, 11, 21일자 목요일 오후 6시)사건에 관련한 내용이다.

 

1996,11,21「공청회」베뢰아 선전 조작 집회

 

이 모임 자체가 어떤 의도에서 시도가 되었는지 모르나 ‘당일에 주최측은 그 이유를 명확히 공개하지 못했다고’ 베뢰아 한상식 목사는 기록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는 관계자의 전언을 따라 일방적인 추측으로 원세호 목사가 ‘자기 독백 식의 강의는 할 수 있어도 공개 석상에서의 토론은 누구와도 자신이 없다는 말인가 ? 아니면 교계 일부에서 “원세호 이단설”이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인가 ?’ 라는 식이다. 한상식 목사의 말대로 과연 그럴까 ? 원세호 목사가 무엇이 겁이나고 자신이 없어서 우유부단한 처신을 한 것인가 ? 그의 글은 원세호 목사를 비하 시키는 강한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청문회 주최측에 명확한 공개가 없는 관계자 전언이라면 그는 누구며 주최측과 원세호 목사 그리고 한상식 목사의 삼지 대면으로 사실을 확인함이 없는한 추측하는 말을 삼가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건대 베뢰아는 이미 이단의 규정을 받은 집단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공청회’라니 무엇을 공청 한다는 말인가 ? 공청이라는 것은 이단으로 규정받기 이전이 아닌가 ? 그런데 주제부터 「베뢰아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라니 이제 베뢰아는 이단으로 규정받은 내용을 버리는 일만이 현명한 것이다. 그러면 그만이다.

지금에 베뢰아 문제를 거론하는 공청은 그 의미가 없으며, 공청회 주제에 따른 한상식 목사의 준비된 자료 역시 합당치 않으며, 이제 비로소 베뢰아가 이단으로 규정받은 사실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한다는 결단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더욱이 원세호 목사를 강사로 초청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베뢰아측은 자금 이래로 변함이 없이 바람만 일으키는 것이다.

공청회 사건은 개최하기 전 한 두시간 전에야 연기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원세호 목사를 강사로 초청한 분이 누구인지 그 사실을 밝혀서 공인받은 교계의 지도자 얼굴을 부끄럽게 말며, 이같은 교묘한 자리를 만들어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버릇을 삼가야 한다. 그리고 공청회가 연기가 됐다는데 왜 다시 실시하지 못하는지 말이다. 객관적으로 보건대 이는 주최측의 농간이 아닌가 ? 그 처신이 의문이다. 또한 공청회 주제와 초청 강사는 주최 측에서 내정이 되는데 원세호 목사가 수락한 조건과는 전혀 다름이 확인이 된다. 그러므로 공청회 모임과 그 주제와 성격은 사전에 베뢰아 측에서 준비하여 나온 것으로 볼 때에 주최 측과 베뢰아 쪽에 사전 수수 관계에 의문을 증폭시키는 것이 아닌가 ?

강사로 초청된 원세호 목사의 말을 들어보면 집회의 조건이나 성격이 공청회 내용과 전혀 다른 집회의 주문으로 황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1996, 11, 21(목) 공청회 사건은 원세호 박사 저「무엇이 문제인가?」(사이비이단성연구/ 국제신학연구소) 책자 51-54쪽에 밝힌다. 공청회는 “계획적으로 조작된 집회였습니다” 그리고 “광고는 집회를 수락한 조건과 전연 상관이 없으며 계획적으로 베뢰아파 선전을 위한 집회”라고 기록한다.

이 시점에서 주최측과 베뢰아가 알 것은 이미 이단으로 규정받은 집단에 대한 공청회라니 크게 각성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베뢰아 한상식 목사는 “베뢰아 운동이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발표문을 준비 하였다면 베뢰아의 ‘주일신문’이나 여타 신문에 기고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에 각 교단이 베뢰아 측을 위하여 공청회에 나설 이유 또한 없다.

 

베뢰아「하나님의 의도」각색한 홍보론

 

이제 베뢰아는 이단으로 규정받은 변별종 신학사상을 버린다는 입장을 지상에 천명하는 것만이 기독교와 융화될 수 있는 최선책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한상식 목사는 베뢰아 운동이 한국교회에 기여하는 방안의 모색을 위하여 “지난 수년 동안 한경직 목사님과 유호준 목사를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을 찾아 뵙고 여러 가지로 지도를 받아 왔고 향후에도 베뢰아 운동이 성경 닮기와 영적 재무장에 힘 쓸 것임을 밝히려 하였다.” 는데 이 부분에 한마디 권고를 한다면 베뢰아 운동이 한국 교회에 기여 하는것은 이단으로 규정된 내용을 배설물 같이 버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지난 수년간 교계의 원로와 지도자를 만나서 지도를 받아 온 결과가 고작 이번에 공청회 준비라면 이는 분명히 기성교회 지도자 접촉이라는 미명 아래에 베뢰아의 필요 충족을 위해서 교계에 공인된 인물의 신분을 도용하여 얼굴 마담의 효과를 누리는 행위라 사료가 된다. 왜냐하면 ‘반박보도문’의 내용이 교계의 원로가 되시는 분들의 지도에 방향의 결과라는 확증도 없으며, 교계의 어른이 베뢰아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며, 만약에 베뢰아 주장을 전격적으로 지도를 했다면 그 분들이 이단이라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현명하신 교계의 지도자는 베뢰아가 이단성 근본에 변함이 없은 즉 한상식 목사의 ‘공청회 발표문’이나 ‘반박보도문’을 적대함을 명심해야 한다. 베뢰아는 원천적으로 이단의 규정을 받은 ‘변별종 사상’이 바뀌지 아니하는 한 이는 여전히 이단의 사상을 중심으로 그럴싸하게 미화 시키는 위장에 불과함을 변명할 수 없는 것이다.

교계의 지도자가 명심할 것은 이단자 집단의 포교 전략에 수단에 따른 집회의 초청이나 만남을 유의하고 분명한 입장을 기록에 남겨서 후일에 개인과 교계에 불명예가 되지 않도록 함이 당연한 것이다. 이단은 할 수 있으면 교계의 간판과 지도자의 얼굴과 명예를 도용하는데 아주 능하다는 것이다. 이점을 극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여하간에 강사 초빙에 엄청난 거금이 거래되는 행위는 이미 초청자를 비롯한 그 주변이 불법적 문제로 얼룩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베뢰아 문제는 김기동 목사가 원세호 목사를 상대할 일이 아닌가 ? 한상식 목사가 알 것은 이미 초 교파적에서 이단으로 검증된 베뢰아를 변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믿는다. 또한 자신의 발표문 역시 김기동 목사의 준비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한 목사는 결코 김기동 목사가 아니며 그를 대변을 하려면 그의 사실적 기록 발표문이나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성도라면 이단자의 만남에서 기독교 명예를 더럽히는 불분명한 초청이나 이름이 공식적 광고 안내에 팔려서 자신과 기독교가 농간을 당하는 것이다. 거듭난 성도로서 주체 의식이 분명한 이는 이단의 집단 옹호에 나서지 않는다.

 

셋째로 : 원세호 이단설 진상은 < 반박문

 

기독저널 1995,8,10 발행인 이흥선 목사「개신교문제연구소 이단. 사이비대책위원회」는 원세호 목사에게「공개 질의서」를 냈으며, 이에 ‘원’ 목사는 「공개 답변서」를 교회연합신문 1995,9,17 (184호) [4] 면에 그 전문을 공개적으로 밝히는데 그는『거짓된 모함으로 한국교회 우롱』이라고 이미 지상에 천명을 하였다.

 

원세호 목사 이단성 운운하는 수법은 베뢰아 이단을 희석하는 방법에 일환으로 일단 먼지를 일으키고 보자는 심산이며, 자기 집단에 무리의 동요를 예방하고 결집케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베뢰아’식 이단의 규정「이단성 희석의 수법」

 

베뢰아 한상식 목사가 알 것은 신학은 성경의 시녀로서 가치가 있으며 때로는 성경에 굴복해야 할 신학적 미숙에서 성숙으로서 성경적 답변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정확무오 불변하나 신학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학의 잣대 표준으로 성경을 침해하는 해석의 탈선적 생각에서는 어디까지나 자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 신학의 무용론을 말 함이 아니다.

예를 든다면 교단의 교조가 주장하는 신학의 특성이라는 벽이 이단자에게 반대 극부로 이용을 당하여 자기의 주장을 극히 정당화 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이단의 신학을 희석하여 이단의 분별에 혼란을 야기 시키는데 적절히 이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전통적인 교단의 신학적 주장 해석이 성경의 정통성에 자리를 찾이함으로 바르게 성경을 이해하는데 불협화음(不協和音)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단의 연구에는 신학의 맹점이나 그 한계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 교단의 신학적인 주장의 미성숙한 견해를 비롯하여 이단의 주장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정통 각 교단이 가지는 특성에서 피차간 부딫치는 면이 있어서 정립할 부분이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에는 일치 한다는 것이다.

이단의 경우는 그들의 신앙고백이 위장된 고백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추가적 계시나 자기 체험을 중심으로 절대 가치화 시키며 여기에는 민간신앙의 정신이 포함된 행위가 신앙고백 뿐 아니라 성경 전반에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성의 얼굴를 정당화 시킨다는 것이다. 베뢰아의 이단성은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도 및 신앙고백 주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단자에게 교리적 미숙점으로 공격을 당하는 요소가 있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단에게 신학적 정죄로 상대적 이단으로 성경적 규정이 아닌 정죄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염소가(유기자) 양(선택)을 이단이라 정죄함이다. 양의 경우 교리적 미숙점으로 약점을 가진다해도 염소의 이단성과는 그 질이 다르다. 이단자는 염소 신분에 이단의 신학사상이라는 함정에 빠진 자로서 이는 마치 우물 안에 개구리 신세이다. 이들의 이단성 시비 정죄는 유기자로서 그 이론이 성경적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다.

신학은 발전에 여지가 있으나 계시는 발전하지 않는다. 이단의 진상과 그 허구성을 연구하려면 문제되는 성경의 근거에 따른 그 타당성을 이해하는데 주의를 기울리고 혹이나 자신이 문제를 삼는 심각성이 성경의 무지로 인한 문제일 수 있지 않는가 ?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미숙한 신학의 수준으로 성경을 종으로 삼아 자의나 인위적 가정으로 해석을 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고 잘 모르면 말하지 아니함이 중간이나 갈 뿐 아니라 과묵한 처신이 유식한 자로 인정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

베뢰아는「원세호 이단 연구설」책자 만들어 유포 했는데 이에 따른 「반증서 및 공개질의서 답변」를 독자들은 참조하여 오해가 없기를 기대한다. 베뢰아가 지적하는 부분은 연구로 보완해야 하는 미숙한 신학적 잣대 접근으로 판단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베뢰아는 이단성이라고 비판한 수준은 그 수가 한 수가 아니라 많은 수가 모자람이 마치 패전하는 막판 바둑에 비교된다. 이단을 만들려면 신학적 이해의 부족에서 발생하는 상대적 이단으로 규정하지 말고 성경의 판정에 따른 절대적 이단이여야 한다.

 

「 나의 수행은 오직 나의 사명 」

 

베뢰아 ‘한’ 목사는 필자에 대하여 “왜 원세호 목사 대신에 그의 동생이 ‘임마누엘 제자성장 연구원 원장’이라는 애매한 직책으로 나서는지 궁금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라는데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본인이 ‘임마누엘 제자성장 연구원 원장’이라 함에 대하여 애매한 직책이라니 무엇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인가 ? ‘연구원 원장’이라는데 말이다. 이점에 대한 필자의 기분을 말하자면 ‘한’ 목사는 쓸때없는 얄팍한 생각으로 궁상이나 떠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음이 정신 건강에 좋으리라 충고한다. 그리고 왜 원세호 목사 대신이라니 무엇을 대신한단 말인가 ? 이 일은 나의 사명 수행의 진행일 뿐임을 알린다. 혹이나 원세호 목사님의 사주나 받고 일하는 ‘꾼’이 아님을 천명한다.

한상식 목사님은 베뢰아 측에 밥 줄이 붙어 있으나 필자는 그럴 이유가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필자의 정신은 혹이 밥 줄이 붙어 있다 하여도 복음이 아니면 아닌 것이다.

 

「이단의 비판은 정당한 종교의 자유」

 

반박문 관련하여 베뢰아 측에 소속된 김○○ 목사로 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인 즉 ‘두 형제가 다 해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무엇을 다 해 먹었는지 소상히 밝혀 주기를 바란다.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 ‘다 해 먹는 일인가’ ? 자신들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 받기를 바라고 이단에 관련한 사명을 수행하는 필자의 베뢰아 비판이 종교의 자유에 포함이 되는데 어찌하여 차단하려 하는가 ? 그게 거듭난 자의 행위인가 ? 이단성의 비판은 서로 물고 먹는 일이 아니다. 교회의 기능 중에 진리를 수호하고 이단성의 침투 예방을 위한 정당한 행위이다.

 

넷째로 : 목회자 본분과 신학자의 임무 < 빈박문

 

「“왜 임마누엘성경연구원의 원세호 목사는 베뢰아 사람들이 귀신을 쫓는 사역을 ‘귀신의 역사’라고 하고 ‘귀신의 교리’라고 비판을 하는가 ? 그의 동생인 ‘임마누엘제자성장연구원’ 원문호 목사는 ‘사단 신학사상’이라고 하는가 ? ”」또한 베뢰아 방병규 목사님 역시 동일한 의문을「주일신문」1997,5,4 [제178] (7)면 필자에게 제기하고 있다. 베뢰아 측을 왜 ‘귀신의 역사’ ‘귀신의 교리’라 하는가 ?

 

베뢰아 귀신 축사 그 배후「악령의 조정」

 

귀신의 축사는 기독교와 이방인 세계에서 사실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단으로 규정을 받은 집단에서 ‘주의 이름’으로 민간 신앙정신의 귀신 축사가 보여진다. 베뢰아 귀신의 축사가 성경에 그 실예가 있다(마7:21-23).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선지자 노릇, 귀신 축사, 많은 권능을 행한 자가 주님을 향하여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3대 행위를 했다고 항변을 하는데 주님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 하셨으니 결론은 간단하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행하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비록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했다고 하나 주님이 모른다는 사실이 이를 확증한다. 거짓된 귀신 축사를 정당화하는 베뢰아 측에 어떤 이들은 그들의 불법이 귀신 축사가 불법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며, 그 불법은 성령의 역사를 행한 자들의 일반적인 불법이라 변명을 하나 이는 억지이다. 여기에 불법은 3대 행위에 대한 불법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거듭나지 못한 세련된 종교인이다. 그들이 구원을 받은 자라면 주님이 도무지 모른다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이 아니며 마귀의 자식이니 악령이 관계하여 주의 이름으로 행하니 ‘귀신의 역사’요 거짓 귀신의 고백과 가르침으로 교리적 체계를 세우고 무속적 사상을 그대로 믿고 따르니 ‘귀신의 교리’로 비판을 받음이 당연하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미련한 다섯처녀가 혼인 잔치에 못 들어가고 닫친 문을 열어 달라고 ‘주여 주여’ 하지만 주님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본인은 왜 베뢰아 측을 ‘사단 신학사상’이라고 하는가 ? 베뢰아 김기동 목사는 자신의 축사 행위에 대하여 개인의 주장이요 학설이라고 그가 말하며 이를 체계화한 신학적 견해를 분명히 하기 때문에 「이단의 신학사상」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깨닫기를 바란다.

 

다섯째로 : 베뢰아 귀신론을 재평가해야 < 반박문

 

베뢰아 귀신론 과연 재 평가의 가치가 있는가 ?

그들은 바리새인이 예수께 비난한 귀신 축사에 관계한 내용에 (마12:24-32), 자신들이 축사하는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동일 선상에 일고의 가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적 귀신 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축사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쫓아 낸 것이다(마12:28). 그러므로 바리새인에게 비난을 당하시는 데 그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은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12:26) 사단은 스스로 분쟁하여 황폐하거나 저의 나라가 서지 못 한다는 말로 바리새인을 교훈한 사실이 있으며,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 (살후2:9-12)

이같은 역사의 실재가 마태복음7:22-23절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축사를 행한 자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불법을 행한 자라고 하셨다. 그들이 행한 선지자 노릇, 귀신 축사, 많은 권능은 주의 이름으로 했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고 성령을 힘입어 행한 것이므로 귀신 축사는 성령의 역사라고 일축하여 불법적 축사가 아니라고 정당화시키는 성경의 이해는 자기 변명에 따른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본문에 기록은 그들의 3대 행위에 대한 주님의 답변으로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법은 주님이 도무지 모르는 유기자의 3대 행위에 대한 불법이다. 그들은 물론 요1서 3: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의 상태에서 선택받은 성도의 신분이 아니고 주님이 도무지 모르는 자들이 아닌가 이들에게 사단의 역사를 따라 악한 자의 임함이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고 그들이 거짓 것을 믿는 것은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심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귀신 축사는 불법이며 그들은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행사하지만 주님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세련된 종교인에 불과하며 완전히 불의의 속임에 거짓 것을 믿는 자들이다. 이같은 불법 축사를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지 말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행한「3대 불법은 악령 역사」

 

불법 축사라는 정상적인 해석자를 베뢰아 측은 성령의 거역이나 훼방으로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자로서 독사의 자식을 만드는데 과연 누가 독사의 자식이 되는지 ? 말이다. 불법으로 귀신을 축사한 자가 오히려 성령을 거역할 뿐 아니라 구원도 받지 못한 자요 그들의 영적 신분은 마귀의 자식이요 진노의 자녀요 독사의 자식이요 양이 아닌 염소인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귀신의 축사는 성령의 역사라고 일축하는 일방통행은 사단의 속임수 ‘주의 이름’ 사각 지대에 불법적 축사를 은폐시키는 것인데 이같은 거짓 것을 믿게 되는 것은 미혹을 받아 속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귀신의 축사에 대한 바리새인의 어리석은 생각에 대하여, 자신이 행하신 역사는 악령에 의함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불법적 귀신의 축사가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대변하거나 불법 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불법적 귀신 축사가 성령의 역사인가 ?

 

「방병규 목사의 편지」「주일신문」에 원문호 목사님께 라는 기록에서「“예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좇았어도 불법을 행하는 자를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귀신을 쫓고 능력을 행한 것을 외면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불법을 행하는 자를 모른다 하신다 는바 불법이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자요 생명의 성령의 법을 거역하는 자를 말하는 것임을 성경을 조금만 더 읽어보시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방’ 목사님은 어떻게 성경을 조금 더 읽어 보셨길래 불법에 대한 이해가 그렇케 알게 되는지 ? ‘미안하지만’ 방병규 목사님은 불법자 3대 행위를 극히 정상적으로 그리고 3대 행위가 불법이 아닌 것으로 외면하지 않는 뜻이라고 하는가 ? 그 문장에 흐름을 보시면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그날에 많은 사람들에게 밝히 말한 것이 ‘불법을 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3대 행위가 불법임을 강력하게 시사 한다. 귀신의 축사가 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 그 역사는 ‘저의 나라’를 무너지게 하거나 분쟁함이 아니라 속이는 자로서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깜짝 쇼’ 같은 역사에 비교되는 것이다.

 

베뢰아 무속과 다른점「주여 주여 주의 이름」뿐

 

민간신앙의 무속에서 귀신의 축사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 그들은 비록 ‘예수의 이름’으로 행함이 아니나 분명한 것은 현장의 현상학적 실재이다. 그러면 베뢰아 축사가 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 다만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베뢰아 귀신론 정신은 민간의 신앙 그대로이다 그러니까 ? 불법적 귀신의 축사가 되는 것이다. 그들의 귀신론에 의하면 언제 귀신이 떠날 날이 있는가 ? 좇으면 나가고 또 들어오고 그래서 여전히 쫓아야 하는 상태가 아닌가 말이다. 그들은 여전히 귀신에게 시달리는 ‘노이로제’성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상식 목사는 「베뢰아 대변가」

 

이단성 베뢰아 귀신론 주장에 대한 한상식 목사의 반박 보도문에 의하면 여전히 베뢰아는 변함이 없는 주장으로 일관한다. 그는 말하기를 “누구라도 정당하게 성서적, 신학적, 현상학적으로 귀신론을 연구한다면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영적 존재임을 밝히는 증거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결론을 맺는다.

폐일언하고 이를 논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베뢰아 귀신론이 재 평가를 받을 가치도 없으며 신본주의 신앙 운동으로 공인을 받으려면 베뢰아 이단의 사상을 버리는 것이다.

2. 반박보도문< ② “참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믿는 목사 정죄는 철회돼야 ”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 (1997, 6, 22 일요일 제26호)

 

첫째로 : 예장통합“바리새 교권 교단으로 규정 < 반박문

 

예장(통합)이 ‘바리새 교권 교단’으로 기독저널(’96,7,1/8)의 규정을 받음에 대하여 한상식 목사는「“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체적으로 양측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여기서 다룰 일은 아니지만 지난 수년 동안 예장 통합 측의 이단 사이비 시비와 관련하여 휘두른 (?)교권적 횡포를 살펴보면 당연한 비판이 이뤄진 것이라 보여진다”라고 한다.

인간의 모임에는 일반적으로 바리새인 경향이 보편적이며 그같은 것이 보인다. 이것은 성장의 한계 교만에 따른 불완전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합 측을 ‘바리새 교권 교단’으로 규정함에는 ‘피차 도토리 키 재기’이며, 이같은 규정이 이단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측면에서 다룬 신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저의가 무엇인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교단을 지칭하여 훌 몰아 ‘바리새 교권 교단’으로 규정함이 그들에게는 구원을 받지 못한 마귀의 자식으로 전체가 귀결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어찌 당연한 비판이 될 수 있을까 ? 물론 어느 정도의 부분적 요소가 비친다고 하여서 ‘바리새 교권 교단’이라면 그곳에 소속한 모든 이들이 주님의 대적 자라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대하여 엄청난 명예를 실추 시키는 오류를 자처함이 되지 않는가 ? 여하간에 이단의 집단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그같은 소리는 사단의 참소에 불과하지 않는가 ?

이단의 경우는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가 기독교로 위장한 ‘오리지널’ 사단적 교만의 집단이 아닌가 ?

물론 정통교회 성도에게도 역시 외식의 일면이 있으나 이는 구원을 받은 자로서 경향이며 점진적인 성화와 인격의 성숙이 기대되는 구성원 교단이라는 점에서 이단의 규정을 받은 집단에 소속된 유기자와 동일하게 비교함은 근본적으로 무리이다. 비록 정통 교회에서 외식과 교만의 경향이 비친다고 하여서 진리수호의 사명을 게을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적 경향의 지적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에 연루된 분이 혹이나 있다면 신분의 여하를 무론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고 그 인격이 자라가야 할 것이다. 이점에는 변명할 이유는 없다고 본인은 믿는다.

 

둘째로 : 종교 재판 기네스북 세계 기록 < 반박문

 

예장(통합)이「“90년대 들어 20여 목사와 관련 교회 및 신앙 운동을 이단 혹은 사이비라고 규정하였다.”」는 점에 대한 그 타당성과 더불어 먼저 한국교회의 영적인 위기를 의식하지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단의 규정이 세계 종교사에 ‘기네스 북’ 수준인 기록이 라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러나 이단의 규정을 문제로 제기하기 이전에 왜 ? 그들은 이단으로 규정을 받은 그 자체의 변별종 사상 그것부터 지적하고 개혁을 촉구하지 않으며, 기독교에 도전하는 발언에만 열을 올리고 급급한가 말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이 이단의 집단과 함께 함이라 믿는다.

한결같이 이단의 규정만을 억울하다고 문제를 삼지 말고 이단의 요소를 제거하고 바르게 세우는 역사에 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기독교적 제3의 종교로 변신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것이 이단의 탈복음적 요소인 기복적 이단의 사상이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하시라도 사이비 이단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을 한다면 어디 한번 이단으로 규정을 받은 집단을 향하여 성경으로 돌아 오라고 먼저 소리를 높여서 외쳐 보시라 ! 이단의 신학 사상을 묵과하는 심보는 과연 무엇인가 ? 어찌 그리도 이단으로 규정한 내용에는 너그럽고 우유부단한 처신으로 정당화하는가 ? 이단의 옹호자 근본 신앙의 바탕이 의심스럽지 않는가 ?

 

셋째로 : “장자 교단” 이단 정죄의 불법성 < 반박문

 

「“예장통합의 정죄는 절차상으로나 내용상으로 원천 무효라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다. 베뢰아 이단의 규정은 예장(통합)만이 아니라. 각 교단 역시 절차와 내용상 검증에 의하여 이단으로 규정을 했다. 원천 무효라는 말은 그들의 근원적 이단의 요소가 성경에 불복하니 무효가 될 수 없다. 베뢰아 측에서는 이단의 규정이 자신들에게「“미치는 피해가 너무나 큰점이 문제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피해는 이단성에 의한 것으로 당연한 결과이다.

오히려 기독교가 당하는 그 피해는 막대한 것이다. 어찌하여 이를 반성하지 못하고 자기들의 피해만을 소리를 높여서 운운 하는가 이는 적반하장이다. 사실인즉 하나님 편에서 볼때에 정통 기독교의 영적인 피해가 오히려 엄청난 것이다. 왜냐하면 이단의 사상은 비복음이며 기독교의 숙적으로 그 악성이 ‘창질’과 같음에 비교되기 때문이다.

 

이단의 규정「원천무효」는 이단성「폐기가 최선」

 

베뢰아 이단의 규정은 결코 불법이 아니며, 이를 원천적으로 무효화 시킬수 있는가 ?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오직 이단의 사상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성경을 상고하자는 운동」이라면 두 말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 그러나 그들은 베뢰아식 이단성의 지속적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뢰아 사상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베뢰아 학설이 성경인가 ? 민간 신앙에 접목한 귀신론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 학설인가 ?

그는 말하기를 더 우위하는 학설이 나오면 굴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교만은 성경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성경이라도 되는양 집요하게 매 달려 추종하는 행위는 무모한 것이다. 이는 자신들 뿐 아니라 한국 교회 및 세계 교회를 위하여 버려야 한다.

넷째로 : 조용기 목사 고개 숙여 (?) < 반박문

 

「예장통합측에 사이비 규정에 대해 그는 총회장들에게 1984, 7, 18일자 / 1994, 8, 29...이 모든 것이 저의 신앙과 인격이 부족한데서 온 것이므로 주의 사랑으로 관용해 주시기 바라 오며」라 하였다.」그래서 고개를 숙였다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자세는 극히 겸허한 표현으로 지혜가 있지 않는가 ? 이것이 통합 측에 고개를 숙임이라는 옹졸한 시각보다는 주의 말씀의 권면을 정중히 받아 드리는 모습이 아닌가 ? 교권에 고개를 숙였다고 종용기 목사 당사자에게 확인된 사실이 아닌즉 이를 비하를 시켜서 충동질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극히 정상적인 사이를 이간 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베뢰아 이단의 규정 요소에 대하여 자신들은 한결같이 성경에 의한 규정이 아니다. 이는 교권에 연루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불법이라는 것이다.

이단을 향한 성도의 자세에서 명심할 것은 한두번 권면해도 듣지 아니하면 멀리 하라는 것이다. 이단이 어디 한번‘변별적 교리의 주장’을 버리는가 보라 어림도 없으며 이를 지속적으로 절대화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소위 ‘지엽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의 핵심 사상이므로 더욱이 강력히 주장하며 사소한 부분에 일부를 수정한다 하여도 세련된 표현으로 비진리를 철저히 미화 시키는 도색에 불과한 것이다. 성도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단자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것이다. 그 길은 유기자 길이다.

베뢰아는 어 느 누가 교단 앞에 고개 숙인다고 비열한 비하적 행위를 버리고, 자신들이 이단으로 규정받은 내용에 대하여 오직 성경 앞에 고개 숙여 굴복하기를 권한다.

 

다섯째 : 베뢰아 귀신론에 대한 오해 < 반박문

 

‘원세호’ 목사가 베뢰아 귀신론에 오해를 퍼트렸다는 것이다. 과연 오해인가 ? ‘오해’ 라는 용어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그릇된 판단이나 잘못 해석’을 했다는 말이다.

이 문제는 그들의 주장을 성경에 조명하면 그 오해인지 여부가 쉽게 풀릴 것이다.

아래의 내용「오해 1-8번」까지 주장에 대한 베뢰아 측에 근거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복음적 주장이 아님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오해라니 천만에 말씀이다

 

① 귀신의 존재는 “예수 믿지 않는자가 귀신이 된다.”고 본다. < 그러나 불신자의 사후 존재가 귀신이라고 성경은 증거 하지 않는다.

② 질병에 대하여 “모든 질병의 원인은 귀신입니다.”(마귀론 김기동 목사 저, 233쪽) < 병이 없는 자가 있는가 ? 그러면 다들 귀신이 들렸다는 말이다. 말이 되는가 ? 현대 과학이나 약품에 의하여 병이 나은 경우에 귀신이 약품에 굴복한 것인가 ?

③ 귀신의 활동에 대하여 “인간의 수명은 보통 70-80세이나 120년을 최고로 하여 90-120년으로 자연 수명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마귀론 上書 226 쪽) 불신자 사망시 나이에 남은 자연 수명까지 사역을 한다는 것이다. < 무속의 신앙 사상일 뿐이다. 자연 수명의 나이 역시 가정에 불과하다. 인간의 나이가 969세로 향수 함이 있기 때문이다.

④ 신론에 대하여 “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성품이시고, 보이는 속성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실 때는 성령으로 나타납니다.” ( 풀빛 목회 1985,11호 57쪽 : 현대종교 1986,3호 139에서 주영흠 박사가 변증함) < 양태론적 삼위일체를 부인할 수 없다.

⑤ 예수의 초림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마귀를 멸하게 하시고”(마귀론 上書 14 쪽) 이다. < 마귀를 ‘멸’함이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⑥ “베뢰아 측에 논리 방식으로 변증하여 준다면 권세는 천사이다.(엡6:12), 성령 임재는 권능이다.(행1:8), 권능은 권세이며 천사이다 ( 행1:8 ). 불꽃과 바람은 천사들이다. (시104:4), 그런고로 행2:3은 성령 강림이 아니라 천사 강림이다.. 좀더 나아가서 성령 충만은 천사 충만이라는 것이다.”(베뢰아 귀신론 비판, 원세호, 저, 162,173쪽) <베뢰아 측은 먼저 왜 성령 충만이 천사 충만이라는 논리를 전개하는지 부터 깨닫자. 성령님은 결코 피조물 천사가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⑦ 베뢰아 귀신 축사는 “귀신은 저주해서 꾸짖어서 내어쫓는 것이다. 귀신을 쫓아내려면 욕 잘하는 은사 도움을 받으라 ‘이놈’, ‘쌍년’, 목사가 경건치 못하다고 만류하면 귀신 못 쫓아” (B#p. 20 : 은사확인론. 하. p.24) < 베뢰아 귀신론 비판 301쪽에 확인되는 바이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음이 성도의 모범이다. 욕 잘하는 은사라니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은사가 있으나 욕잘하는 은사의 도움으로 귀신의 축사는 없다. 베뢰아 주장은 악령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저질적인 언어이다. 귀신를 욕으로 쫓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과 그 권세에 굴복하는 것이다.

⑧ “베뢰아 귀신론은 귀신에게 물어서 보고 귀신과 대화하여 귀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고 주장”함이< 오해를 퍼트린 것인가 ? 아니다. 베뢰아 측에 김기동 목사는 귀신 축사의 현상학적 사실에 기록을 성경에 접목하는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을 했으니 귀신의 고백을 그대로 믿고 인정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오해라니 이는 한 마디로 가당치 않은 것이다.

이상 간략한 내용으로 보건대 베뢰아 비판은 ‘흑색선전’도 아니오. ‘루우머’도 아니오. ‘오해’ 역시 아니다.

오히려 거짓 말쟁이에 의하여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났다는 오해를 의도적으로 베뢰아는 발생케 한다.

한상식 목사는 진실에 오해를 하고 계신다. 거짓을 오해하는 것은 영원히 벗어 날 수 없다. 아무리 세련된 표현으로 도색을 한다 하여도 그 속에 거짓이 진실로 둔갑을 하지는 아니한다.

 

여섯째 : 베뢰아 귀신론 이단 규정 해제해야 < 반박문

 

베뢰아는 이단 규정의 해제를 위하여 “1차 94년 8월29일, 2차 95년 12월 총회 임원 명의로 예장 통합 총회장에게 공개 질의를 보내어 베뢰아 귀신론과 관련된 이단 규정이 부당함을 밝혔고 성락교회 사무처리회는 96년 4월2일 이단 규정 철회를 요청 하였다. 왜 지금까지도 예장통합은 이단 규정을 철회하지 않는가 ? 누구처럼 김기동 목사가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인가 ? 그렇다면 베뢰아 귀신론에 대한 규정 철회는 불가능한 일이다.”는 것이다.

베뢰아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단의 규정 철회’는 이단 신학사상 철회와 더불어 이루어 짐이 상식이라는 것이다. 기본적인 상식을 벗어나지 말자. 근본에 변화가 없는데 이단규정의 철회는 불가능이다. 혹이 어느 교단이 푼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근본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성경은 여전히 이단으로 규정한다는 사실 앞에 두려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근본에 변화가 없는데 선한 행위로 이단의 규정을 풀려고 사회사업이나, 교계 연합 사업의 감사패, 기념관 내외부 시설 보완을 위한 헌금 찬조를 비롯하여 95년 희년대회에 절반의 모임에 참여한 실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착한 일을 하니까 이단이 아닐 수 있는가 ? 그것이 아니다. 이같은 발상은 근본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는 다만 한국 기독교인의 눈을 속이는 ‘액숀’에 불과한 것이다. 기독교 우리 안에 들기를 그토록 원한다면 ‘변별종 교리’를 버리고 그 열매로 선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이 옳은 것이다.

 

「교단에 고개」숙이지 말고「성경에 굴복」하라

 

한국 교회가 김기동 목사의 고개를 숙임을 원함이 아니라 교회를 부패케 하는 창질같은 이단의 사상에 대하여 과감히 버릴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노략질하는 이리의 본성을 버려서 羊으로 개종하지 않는한 교계 우리 안에 영입은 불가능이다. 어떤 이들은 베뢰아를 적당히 영입하려고 그 방법 모색을 한다는 이런저런 소리가 대내외적으로 들리는데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렇다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아마도 활동비 부스러기 맛에 그런 짓을 하지는 않는지 또한 의문이 가기도 한다.

이단의 규정 철회는 교권이나 제도에 따른 정치꾼의 결정이 아니다. 근본적 이단의 사상을 버리면 되는 것이다. 개종한 자를 누가 정죄를 하리요. 그러므로 “누구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기 때문에 이단의 규정이 철회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베뢰아가 이단의 규정 철회를 요청하는 입장에 자신들이 놓여 있음을 바로 안다면 그 무슨 배짱이길래 “누구처럼 김기동 목사가 고개를 숙이지 않아서 인가 ? 그렇다면 베뢰아 귀신론에 대한 규정 철회는 불가능한 일이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베뢰아 이단사상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단의 규정 철회 문제를 제기하여도 ‘영원히 미결’ 일 뿐이다.

그 누구처럼 고개를 숙이라면 “귀신론에 대한 규정 철회는 불가능한 일이다” 라니 그 무슨 고집인가 ? 베뢰아 해결 방법이 ‘공개 질의서’나 보내고, ‘공청회’ 분위기를 적절히 이용하고, 교계의 지도자 강단의 교류를 시키는 방법인데 이같은 방법은 이단의 규정 해제에 효과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본인은 베뢰아에 진실한 마음으로 권고한다. 그곳에 온건파에 속한 지성인이 계시리라 믿어지는데 베뢰아 측과 한국교회 이단의 규정 문제로 대치됨이 변별종 교리로 융화되지 못함을 안다면, 고얀히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김기동 목사를 향하여 이단성 탈 복음을 버리자는 운동을 강력히 촉구를 하자는 것이다.

 

「이단규정 철회」열쇠는 「김기동 목사」자신

 

그러면 영적으로 김기동 목사도 살고 그곳에 신자를 비롯한 모두가 ‘이러저러’한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제반의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확신한다. 성경대로 사는 길은 내부에 복음주의 개혁의 세력이 있어서 강경하게 기치를 들어야 한다. 더 쉬운 방법은 김기동 목사가 이단으로 규정을 받은 내용을 폐기하면 아주 간단히 해결이 되는 것이다. 이 권고는 충동질 함이 아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모두가 사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베뢰아 이단의 논쟁과 규정이 성경을 바탕으로 하는데 기성 교단이 혹이나 베뢰아 측이 대형 교회로서 교회 연합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인색한 이유를 꼬투리 잡아서 이단으로 베뢰아를 올가미 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다면 이는 참으로 자가당착이다.

또 한가지 지적을 한다면 이단의 ‘규정철회’ 요청을 왜 예장(통합)에 목을 매는가 ? 김기동 목사가 본래 소속한 교단이 어디인가 ? ‘기독교한국침례회’이다. 여기에서 풀면 풀리는 것이다. 조건은 이단의 사상을 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다. 이것 역시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이단으로 규정받은 내용을 폐기하면 된다. 더군다나 대 교단인 예장(통합)을 ‘바리새 교권’이라 규정을 하면서 그곳에 목을 매는 형편으로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는가 ? 그리고 예장(통합)이 베뢰아는 이단이 아니다 하면 각 교단이 이구동성으로 이단이 아니다 할 것이라 믿는가 ? 어림이 반푼어치도 없다. 죄송하지만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이단의 사상을 버리고 그 논쟁으로 탈퇴한 소속 교단으로 부터 이단의 규정 철회를 요청함이 순서라 믿어진다. 예장(통합)에서 베뢰아 공개 질의서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지만 보일 것도 없다고 본다. 이미 결론이 지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베뢰아 측이 성경으로 돌아오는 ‘길’이 최선 책이다. 어찌하여 베뢰아는 자존감도 없는가 ? 어느 교단에도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치사한 기분도 없는가 ? ‘이단의 사상’을 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요즈음 이단은 공개 질의서 보내는 일로 재미를 톡톡히 볼려고 작정이나 했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다 아는 바이지만 헛되어서 후회할 뿐이다.

이단자 시비에 한국교회 성도는 이단의 공개 질의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말고 이미 이단의 규정을 받은 집단의 ‘변별종 이단 교리’를 배설물 같이 버린다는 ‘양심의 선언’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아니면 조금도 마음에 흔들림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위하여 열심하 자기의 본분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언론을 통하여 이단자가 우리가 무엇이 이단이냐 전략에 속지 말자.

3. 반박 보도문 < ③“하나님의 의도 신학은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의 신학”이라는 주장에서 (1997, 6, 29 일요일 제27호) 그들의 표면적 신학 이론과 내면의 이단성이 일치하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 ‘성경의 베뢰아’, 원 목사의 베뢰아 < 반박문

 

한상식 목사는 헬라의 도시 중에 베뢰아와 김기동 목사 베뢰아 측에 신앙의 구분이 잘 안되는 모양이다.

성경에 나타난 베뢰아인의 신앙은 성도의 모범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발생한 베뢰아 김기동 목사 신앙은 무속 신앙을 쫓은 것으로 귀신의 가르침에 의하여 체계화되어진 것이다. 원세호 목사의 베뢰아 비판은 성경으로 검증한 결과이다. 그 결과는 범 교단적으로 이미 규정한 복음의 맥을 같이 한다. 베뢰아 측에서는 원세호, 최삼경 목사가 자기들을 이단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나 어리석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이미 이단성 비복음 요소를 성경에 의하여 밝힌 것일 뿐이다. 김기동 목사 측에 베뢰아는 성경 베뢰가 아니다. 김기동 목사 베뢰아이다.

 

둘째로 : 바리새 교권이 베뢰아의 성령 사역을 악령의 사역으로 < 반박문

 

‘주의 이름’으로서 ‘귀신 축사’는 그 모든 것을 다 성령의 역사로 과연 보와야 하는가 ? 일반적인 귀신 축사를 구분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축사, 이방인 중에 신들린 자가 행하는 축사,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불법 축사가 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주님의 축사 사건이 성령의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악령의 사역으로 비난을 했다. 그러나 요즈음 베뢰아 귀신론 정신에 입각한 귀신 축사는 불법 축사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이 아니며 악령의 사역에 불과한 것으로 이것은 마치 ‘깜짝 쇼’에 비교되는 행위이다. 이는 3대 불법 중에 하나이다.(마7:21-23) 성령의 사역이 있으면 악령의 역사도 있게 마련이다. 악령의 역사를 성령의 사역으로 위장하는 감언이설이나 귀신의 사실적 현상에 속지 말자.

 

세째로 : 베뢰아 운동의 이상과 주장 < 반박문

 

김기동 목사 측은 “베뢰아 운동의 모범, 개념, 이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 베뢰아 인의 모범 ① 베뢰아 인은 신사적이다. ② 베뢰아 인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 ③ 베뢰아 인은 성경에서 믿음을 얻는다.

▲ 베뢰아 운동 개념 ① 베뢰아 운동은 신약교회 운동이다. ② 베뢰아 운동은 성경 닮기 운동이다. ③ 베뢰아 운동은 평신도 운동이다.

▲ 베뢰아 운동의 이상 ① 신본주의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밝힌다. ② 능력의 보편성을 증거 한다. ③ 침례를 주고 제자를 삼는다. 다는데 과연 그런가 ?

이상에 주장은 베뢰아 이단의 규정에 비복음적 사단 신학 사상을 추종함에는 표면적 선전 이론에 불과하다.

1) 베뢰아 인의 모범 < 반박문

 

한국에 있는 ‘베뢰아 운동’과 초대 교회 베뢰아 사람의 그 모범적 차이는 무엇인가 ? 초대 베뢰아는 신사적이며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이다.

그러나 한국의 ‘베뢰아 운동’은 그들의 표면적 타당성 전개와 내면의 이단성은 초대 교회의 그들의 삶과는 상거가 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 베뢰아 주장은 그 자체가 ‘다른 복음’ 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베뢰아의 결론적 귀결이 모범이라면 성경에 나타난 베뢰아 인들이 이단으로 규정을 받아야 하다는 논리가 된다. 그러나 초대 베뢰아 인은 오늘날 한국에서 자생한 베뢰아 주장을 절대 거부한다. 한국에 베뢰아는 표면과 이면의 실재가 이질적인 주장으로 앞과 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질적인 요소가 살아 있은 즉 베뢰아 운동의 이상과 주장이 ‘양의 옷’에 불과한 것으로 악한 자의 가장일 뿐이다..

 

2) 베뢰아 운동의 개념 < 반박문

 

「“베뢰아 운동을 설명할 때에 신약교회 운동, 평신도 지도자 운동, 성경 닮기 운동 세 가지를 합해져야만 온전한 개념이 된다”」것이다.

말로만 그라지 말자. 베뢰아 측에 이상과 주장은 적구지병(適口之餠)이다. 자기 입맛에 따라 세 가지 개념으로 신약교회, 평신도 지도자, 성경 닮기 운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단성을 버리고 성경적 순수 개념으로 운동을 전개함이 순리이다. 성경적 가치로 인정을 받으려면 원론적 의미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신약 교회가 어디 한국의 베뢰아에 모순적 이단성에 기초하는가 말이다. 성경 닮기 운동을 주장하는 베뢰아는 ‘신론, 기독론, 성령론, 창조론, 구원론, 율법과 복음, 부활론, 악령론, 내세론, 등...전반에 걸치어 탈선을 주장하며 때로는 횡성수설할 뿐 아니라 앞과 뒤가 맞지 아니함이 일반이다. 이단자의 말은 시작은 매끄러운 것 같으나 일관성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 닮기 운동을 주장하는 베뢰아는 노략질하는 이리의 속성에 양의 옷으로 가장한 거짓 성경 닮기 운동이다. 이 운동은 신사적이 아니다. 사실이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한 결과가 아니며,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믿음의 결과도 아니다. 이는 다만 마귀적으로 깨달은 것을 위장하려는 포장 이론 개념에 불과하다.

 

3) 베뢰아 운동의 이상 < 반박문

 

베뢰아의 이상은 「“신본주의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밝힌다는 것이다.”」과연 그런가 ?

신본주의에 입각한 이상론이 베뢰아 ‘시무언’ 김기동 자신의 신학 사상이란 말인가 ? 신본주의는 김기동 목사의 이단성을 배격하며 그의 주장은 성경적 발상이 아니다. 그가 밝히는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이 고작 이단의 규정이나 받고 있는가 ? 그들의 주장에는 추호도 주목할 필요성이 전혀 없다. 기독교의 생명을 잃게 하는 시무언과 함께한 사단적 의도를 밝힘에 불과하며, 그들의 축사는 미혹케 하는 능력에 보편성이며, 베뢰아의 마본주의(魔本主義) 사상을 주입하는 운동의 일환일 뿐이다.

 

4) 하나님의 의도 베뢰아 신학의 중심 주제 < 반박문

 

「“베뢰아 신학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이름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시무언신학 김기동 신학(Kim KiDong Theologe)은 시무언 자신의 신학 사상을 구체적으로 지칭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다. 사도 신학은 신학자의 인본주의 시각에 대비하여 초대교회 사도들의 신학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한국 신학(Theologe in Korea)은 한국이란 장소를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베뢰아 신학은(Berean Theologe) 베뢰아 사람들의 신학이란 의미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on)신학을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라 하여 신학의 내용과 관련하여 사용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위의 신학에 다양한 표현이 ‘시무언 신학’ ‘사도신학’ ‘한국신학’ ‘베뢰아 신학’ ‘하나님의 의도신학’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을 중심으로 “수입 신학이나 번역 신학을 탈피하는 탈서구신학임을 표방”하는 것으로 베뢰아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에서 요한 신학을 재조명하는 사명감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베뢰아측 운동에 관련한 신학임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최소한 베뢰아가 ‘신본주의에 의거’한다면 탈복음적 이단의 사상에 따른 체계적 신학을 거론치 말아야 할 것이다. 베뢰아 주장은 이단 신학의 확산을 위한 마귀의 사상이다.

베뢰아 추종자는 이단 신학 사상에 사로잡힌 자로서 철저히 구분이 되어야 한다. 신학이란 신본주의 원론에서 탈선하지 말아야 그 가치가 인정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경이 아닌 이단의 사상을 ‘신본주의’라고 믿는 것은 악한 자의 임함에 결과이다.

신학은 반드시 성경적일 뿐 아니라 어떠한 경우나 실재적인 상황에서도 성경의 장애물이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신학에다 성경을 접목시키지 말며, 어떠한 신학도 성경의 조명을 받아 그 가치 여부가 검증을 받아서 공인돼야 한다.

5)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란 < 반박문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위한 신앙생활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은 베뢰아를 중심한 목적의 성취가 온전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베뢰아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의도란 말이다. 과연 그런가 ?

2)에 내용을 보자. 현대 교회 신학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경악스런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대 교회는 인간의 구속을 중심으로 일관된 신학적 입장으로 인본주의에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베뢰아는 인간의 구속을 중심으로 일관된 신학의 입장이 인본주의란 말인가 ? 성경을 구속사 입장으로 보지 않는 무리는 탈 신학자를 포함하여 사단의 굴레에 사로잡힌 하수인이다.

「“김기동 목사는 ‘오늘날 정통을 자처하는 기독교 교리와 신학은 만사를 인간 본위로 규정하고 해석하는 인본주의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시는 구속의 역사로 본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며 시야를 넓혀 신본주의 곧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경 전체를 조감한다면...곧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서 하늘 보좌에 앉히시려는 제1의적인 의도와 마귀 진멸이라는 제 2의적인 의도가 있으며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데 쓰임 받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제 3의적인 목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된다 고 말한다.”」

과연 베뢰아의 말이 정당한가 ? 예수님의 구속사를 구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인간 본위의 규정이요 인본주의 사상에 기초함인가 ? 성경은 밝히 증거 한다. 그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린 신바 되었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하셨다.(히9:28,요3:16)

김기동 목사야 말로 ’마본주의 사상‘에 기초한 연고로 하나님의 구원을 은혜가 되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은 논리로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 되이 해석한다. 그는 인간의 구원이 제 3의적인 목적에 불과하며, 다만 제1과 제 2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인간은 사전에 안내자 통로요 도구로서 오실 길을 위해 봉사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제1, 2의적인 성취를 위하여 에덴 동산의 사건이 비롯되고, 십자가의 구속의 궁극적인 목적 역시 마귀의 박멸을 위하여 의도가 되어진 사건이라는 결론이다. 이것은 베뢰아 귀신론을 의도적으로 절대화시키는 수작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의 조감이 아니며, 마귀의 견해로서 인본주의를 벗어나 근원적으로 마본주의( 魔本主義 )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믿는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생명에 이르게 하심이다.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제한하는 행위나 바울의 신학을 중시함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자는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역사 함이 다른 복음, 다른 교훈, 다른 영, 다른 예수를 믿는 자이다.

 

6) 하나님의 의도란 < 반박문

 

「“하나님은 아들을 후사로 세우셨다 (빌2:9-11). 그리고 아들을 위하여 하늘을 지으시고 보좌를 두셨다(히1:2).”“아들이 고난의 죽음으로 사단을 멸하려 하셨다.(요일3:8)”」는 주장이다.

그러면 히브리서 1:2절에 근거를 찾아보자 하나님이 아들을 위하여 하늘을 지으셨다는 말이 있는가 없다. 오히려 저로(아들)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가르친다. 성경을 똑바로 보고 속이지 말자.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창조의 목적은 그를 위하여 창조되고(골1:16),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43:7)이다. 그가 인간을 향하신 궁극적 의도는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함이다.(롬8:29,30), 성도의 생활에 의도는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고전10:31). 그리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 그 뿐 아니라 그 안에서 기업이 되어서 일 한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다(계22:12).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9)이며, 예수가 나타나심은 ‘사단을 멸’하려 함이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심이다(1요3:8). 그러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사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이다.(엡1:3-14)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기 위하여, 마귀를 멸하려고 인간을 도구로 삼은 것이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베뢰아 측에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에 이론의 정당화를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죄인을 구속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을 하시고 성도의 승리로운 삶을 위하여 마귀의 일을 멸하시어 이기신 것이다. 고로 성도는 악령을 두려워 말고 대적함으로 담대해야 한다.

 

7) 하나님의 의도와 영적 생활 < 반박문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생명이 풍성한 생활을 한다(요4:24).”」는 주장을 인정할 수 있는가 ? 그러면 베뢰아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란 것이 무엇인가 ? 첫째, 하나님은 아들을 후사로 세우심이 제1의 의도요. 둘째, 마귀 진멸이며, 셋째, 이 두 가지 목적을 이루는데 쓰임 받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제3의적인 목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베뢰아가 주장하는 그 의도가 과연 성경에 합당한가 ?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제3의적인 목적에 불과한 것이라니, 그리고 마귀의 진멸과 그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심을 위한 도구라니 말이 되는가 ? 성경의 오해에 지나친 왜곡이다.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후사로 세우기 위함과 마귀 진멸을 위한 목적에 정죄를 위하여 인간이 도구로 쓰임을 받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속하시려고 그의 아들 예수님이 희생을 하셨으며, 아들이 나타나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인간을 도구로 사용을 했다는 베뢰아의 주장은 김기동 목사의 의도로서 영적인 배후가 마본주의에 연루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향하신 제1의 목적은 인간을 구속함이다. 여기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제3의적인 목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베뢰아의 망발이다. 이같은 주장은 하나님의 구속이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주장이다.

그릇된 베뢰아 의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를 추종하는 무리의 영적 생활이 올 바르다 할 수 있는가 ? 그들의 말대로 믿는다면 베뢰아의 의도에 따른 마본주의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을 뿐인 것이다.

베뢰아는 영생을 얻음이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이는 말이 되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영생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결과로서 은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도를 베뢰아 측에 주장대로 알아야 한다는 영생에 ‘전재 조건’이 없다. 성경을 찾아 보라 베뢰아에서 주장하는 의도를 아는 사람이 영생을 얻는다는 증거가 있는가 ? 말이다.

 

「“베뢰아 인은 성경을 상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다(행17:12,13).”」는 주장이다.

이는 초대 교회 베뢰아 인에게 통용되는 것이다. 오늘날 베뢰아 김기동 목사에게 해당이 되지를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그대로’ 받지 않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베뢰아 사람이 언제 한국에 베뢰아 같은 주장을 했는가 베뢰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본주의(魔本主義)로 받고 있다. 그러니까 ? 이단으로 규정을 받는 것이다. 말씀을 ‘그대로’ 받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베뢰아가 아무리 미화된 정통성 주장을 한다 해도 이단 의 사상을 버리지 않으면 인정될 수 없음을 명심하자. 베뢰아의 거짓된 주장을 버리지 않는 한 표면적인 신앙고백의 선언 그 진실을 입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4. 반박 보도문 < ④ “베뢰아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와 침례 축사 신유의 증인” (1997, 7, 13 일요일 제28호)

 

첫째로 : 신앙고백과 신학 < 반박문

 

「“신약 교회의 신학은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신앙고백 입장에서 설명된다.”“신학은 성도를 위한 신학 이여야 하고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오늘날에도 목회자든지 성도든지, 아니면 신학자든지 누구라도 교회에서 성령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듣고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떻게 보면 극히 원론적 이상을 표명한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듣고 순종하여 실천하고 있는가 ? 자신이 주장하는「시무언 신학, 사도신학, 한국 신학, 베뢰아 신학, 하나님의 의도 신학」이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가 ?

베뢰아 신학이 신약 교회 공동체가 고백한 입장인가 ? 그리고 성도를 위한 것이며 교회에 유익한가 ? 성령의 가르침인가 ? 이미 그들의 열매가 성도, 신학자, 목회자, 교회에 유익하지 못하며 그리스도 인과 함께 사는 신학이 아님이 이단의 규정으로 검증이 된 바이다. 베뢰아 신학의 보편성이 어디에 인정을 받는가 ? 각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받은 베뢰아의 신학을 필자는 마본신학(魔本神學)이라 칭한다.

 

둘째로 : 사도 신경과 한국교회 이단시비 < 반박문

 

「 “교계의 여러 인사들을 만나면서 베뢰아 운동을 하는 성락교회가 사도신경을 인정한다면 이단시하여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는 말들을 듣곤 한다. 이는 공예배 중에 성서공회의 개혁 성경과 한국 찬송가 공회의 찬송가를 쓰면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담긴’ (?) 사도신경 까지도 암송한다면 한국교회의 일원이라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베뢰아는 어이 하든지 한국교회 일원이 되기를 바래서 이 소리 저 소리 중에 자기 필요에 따라 인용하여 베뢰아를 이단시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상식 목사가 만난 여러 인사들이 누군 지를 알 길은 없으나 사도신경을 인정하면 어떻게 이단으로 문제를 삼을 이유가 없는 것인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의 인정도 표면적인 인정이 있다. 그것은 이단의 규정을 받은 무리나 집단이 주장하는 것이다. 노략질하는 이리가 양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그리고 이미 각 교단에서 노략질하는 이단의 정체가 드러나서 나쁜 열매로 입증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이단의 문제를 삼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단이 아니라 함이 동일한 성경과 찬송을 사용하고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암송을 한다고 이단이 아니며 한국교회 일원이라 여겨야 한다는 발언은 거짓 마귀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 베뢰아 사람들의 신앙고백 < 반박문

 

「 “1990년 총회 회의록부터는 역사적 침례교회와 신앙고백을 명시하였다. 다음으로 김기동 목사의 신앙고백이 있다...성락교회의 신앙고백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이상에 관계한 베뢰아 측에 주장에서 유의할 것은 위장된 표면성 고백과 내면의 이질성이 무엇인지 확인하자. 베뢰아측은 김기동 목사가 주장하는 비복음인 이단의 사상에 대한 복음적인 반전이 없은 즉 이단의 규정을 벗어 날 수 없음을 명심하여 할 것이다. ‘이단 신학 사상’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과 폐기 그리고 자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성경으로 돌아 와야 한다. 기성교회 성도는 아래의 내용을 잘 확인하고 고얀히 할 일 없이 비판을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반박 보도문은 이단에게 미혹을 받은 자에게 다시금 돌이킬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이며 이단자에게는 구원의 빛이라는 것이다. 버릴 것을 버리고 돌아서기를 기원한다. )

 

1. 성경

 

「“우리는 성경은 영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무흠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며 또 신약 성경은 성도의 신앙과 생활의 본이 됨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이질성은 “김 씨는 한편으로는 성경을 강조하지만...현재 성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 한다고 하였다.(김기동 ,영원한 관계, pp, 68,69). 또한 오늘에 성경에는 성경과 성서가 있는데 성경은 계시이기 때문에 가감할 수 없지만 성서는 계시인 성경을 증거해 주는 것으로 가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성경은 모세 오경과 공관 복음으로 8권이요 나머지 58권은 성서라고 하였다.(베뢰아 9기생 녹음 테이프24-1)[사이비 이단 연구/예장통합 상담소 자료집 1/ 8,9 쪽]

기독교 세계 91년 9, 758호 기감자료 14쪽에 ‘이단 사상의 미혹을 경계하라’ 는 내용 가운데 “김기동이 주장한 계시론 신론 창조론 미귀론은 모두 이단 사상이다. 첫째, 계시론에 의하면 성경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불과하며 자신의 설교도 성서적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2. 삼위일체 하나님

 

「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으며 또 삼위일체이심을 믿습니다.”」 주장한다.

 

그러나 베뢰아의 주장은 양태론 이다 “하나님이 곧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 아버지가 되십니다(요14:8),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있으면 성령이 되십니다. 삼위의 각각 개체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장소에 따라 불려지는 이름이 다릅니다....인격은 오직 하나입니다. 각각 개체의 인격으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베뢰아 9기생 강의 녹음 테이프 9-2)[예장 통합 자료 上書 8쪽]

삼위일체에서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 단일성과 삼위성을 인정하여야 하는데 베뢰아는 양태론 이다.

 

3.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김기동 목사는 “기독론에 신성을 부인하고 인성을 제한한다.”(마귀론 상 p.112) “김 씨는 먼저 이단자 에비온파처럼 신성을 부정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신의 생애가 아니고 사람의 생애인데 오히려 예수님을 신이라 하면 이단이라고 하며(테이프19-2) ...김 씨는 인성을 제한하여 콘스탄틴노풀회의(A.D 381)에서 이단자가 된 아볼로나리우스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수준이라고 하며 그래서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그 살은 영이라고 한다. (베뢰아 사람 1989년 3월, P. 44)

 

4. 성령

 

「“우리는 성령의 인 치심과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의 역사 하심이 있음을 믿으며 기도하고 간구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

 

무엇이 다른가 ? (80쪽) 김기동과 베뢰아 아카데미의 정체 ‘기침’ 이단 규정 자료 중에 “김기동 씨는 삼위일체중 한 분이신 성령과 피조물인 천사를 혼돈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관해서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 하나님이 보내시는 영들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상 p. 112)

베뢰아에 대하여 많은 사람은 귀신론에 관한 것이 문제라고만 보는 시각인데 알고 보면 그 이상에 것으로 성경 전체의 교리적 체계가 잘 못 됐음이 연구의 결과라는 것이다. 신론의 신앙고백과 그의 주장이 어떻게 다른지 독자 스스로 는 이를 숙지하여 이단자 선전 이론 주장에 현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5. 인간

 

「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계획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마귀 유혹으로 범죄 하여 죄인이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을 믿습니다.”」

 

베뢰아 인간론을 살펴보자 “창세기 1장의 인간과 2장의 인간은 다르다고 한다. 김 씨에 의하면 인간은 혼과 몸만을 가진 동물의 자웅을 칭하는 용어요, 2장의 인간은 그 중에 뽑힌 개화된 인간, 즉 영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마귀론 상, P. 79)”

“김기동 씨는 창세기 1장에 대한 기록 이전에 이미 땅 위에 인류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 창조의 목적은 타락한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하며 그는 세상을 하나님이 사단을 형벌 하려고 만든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의도 P. 29 ; 신앙문답 정신 P. 8 ; 마귀론 P. 4)”

“인간은 사단을 정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인간은 그가 오실 길을 위해 봉사한 것입니다.”(Ibid. p. 74) “인간은 마귀를 멸하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위한 사전의 안내자였기 때문입니다.(Ibid, p. 74)[베뢰아 귀신론 비판 원세호 박사 저, 100쪽)

 

6. 구원

 

「“우리는 구원은 오직 예수의 피로 구속하신 은혜로 받음을 믿으며 또 신자의 회개와 거듭남을 믿습니다.”」

 

베뢰아는 “거듭난 사람은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타락하게 되었을까 ? 큰 이적을 행한 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구원의 중보가 되어지고 있을 때 이는 타락한 것이다.” (자료 김기동 저 마귀론 중 P. 78)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자료: 김기동 저 마귀론 하 P. 167) 라고 하면서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라 불러도 구원이 없었다.”(자료 김기동 저, ‘성령을 알자’ P. 46) 김기동 목사의 구원론은 앞과 뒤가 맞지 아니하며 횡설수설한다. 언제는 결코 타락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타락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구약 시대에는 구원이 없다니 뭐가 맞는 것인가 ? 말이다.

“귀신을 쫓다가 교만하여 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만은 용서받을 길이 없고 속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모든 불순종은 속죄 받을 수 있어도 교만은 용서받을 길이 없습니다. 불순종하는 데서는 건져낼 수 있지만 교만한 데서는 건져낼 수 없습니다.”(Ibid, p. 51)[베뢰아 귀신론 비판 원세호 박사 저, 102쪽) 그리고 베뢰아 식의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라는 전재조건 반박 보도문 ③ 내용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 없다. 더구나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도 베뢰아 의도는 비복음이다.

 

7. 교회

 

「“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믿으며, 교회의 입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베뢰아 측은 신론에 있어서 기독론과 성령론과 성부론에 양태론적 주장인 고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온전하다고 인정 될 수 있는가 ?

 

8. 의식과 직분

 

「“ 우리는 의식에는 침례와 주의 만찬이 있음을 믿으며 또는 목사와 집사의 두 직분이 있음을 믿습니다.”」

 

침례와 만찬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는 속죄론에 일관성을 보여야 한다. 교만의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는 주장에는 오류적이며,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라는 주장은 침례교에 입장이며 그 외에 직분이 다양함을 인정해야 한다.

 

9. 종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재림하실 것을 믿으며 또 성도의 부활과 영생을 믿으며 의인은 영생에 믿지 아니한 죄인은 영벌에 들어감을 믿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을 누가 이단이라 할 수가 있는가 ? 이는 역사적인 기독교 기본 교리이다.”라며 베뢰아는 이단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있다.

물론 이단의 사상이 물이 들지 아니하고 바르게 믿는 다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 하겠는가 ? 그러나 베뢰아 김기동 목사의 경우는 예외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신앙고백의 전문과 그의 체계적인 신학은 성경으로 일치하지 아니하는 고로 이단의 규정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세기 이단의 유행이 있다. 그것은 신앙고백을 강력하게 전제를 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단의 규정 내용을 지엽적인 것으로 보아서 슬쩍 슬쩍이 넘어 가려고 여기 저기에 지면을 통하여 재빠른 잔꾀를 부리는 소리가 마치 ‘개구리의 합창’과 같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기독교를 매우 혼란을 시키고 있다.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단자의 「신앙고백 전문」은 ‘양의 옷’으로 위장한 ‘겉옷’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베뢰아 이단 사상과 관계없이 처음 예수를 바르게 믿고 신앙 고백한 성도는 구원을 받음에는 이상이 없으나 이단에 미혹을 받아 그곳에 계속 머물러서 이단을 대변하고 기성 교회를 도전하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한다면 그의 구원은 신분 여하를 무론 하고 구원이 의심스럽다. 그리고 뭐가 뭔지도 모르다가 그곳에 간 경우라면 그는 베뢰아의 이단 사상으로 물이든 분일 것이다.

여하간에 본인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믿어지면 그곳에서 빨리 나와야 한다. 그곳은 ‘羊의 우리’가 아니다. 그곳에 모인 무리를 이끄는 그가 이단으로 규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머물러서 김기동 목사를 대변한 ‘민병소’ 목사를 보자. 그가 베뢰아를 버리는「양심 선언」의 예를 보자 이는 이단 연루자에게 참으로 귀감을 삼을 일이다.

고얀히 ‘신앙 고백 전문’ 만으로 나는 이단이 아니다. 주장만을 하지 말고 이단의 규정 내용부터 청산하고 바르게 설 때에 ‘신앙고백의 전문’도 함께 인정되는 효과가 있다. 이단은 할 수 있으면 미혹을 위하여 역사적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자기의 정체를 숨기는 위장 내지는 가장의 도구로 사용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속지 말자.

* 마7:15,16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넷째로 : 베뢰아 아카데미와 “제자들” (?) < 반박문

 

「 “96년 7월26일 <기독 저널>(발행인 이흥선)은 ”김기동 목사 이단이 아니다.“라는 기사를 내 보냈다. 이 기사는 베뢰아 수료생 중에 교계에 지명 도가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 대학 교수들에 대해 언급했다.”」

 

위의 내용에 언급된 지명 도가 있는 교계 지도자가 과연 제자냐 아니냐 ? 는 문제가 들어 있는 것이다. 먼저 알 것은 그들이 비록 학문적인 호기심으로 수료를 했든지 아니 했든지 간에 현직 목회에서나 신학교 강단에서 베뢰아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면 그의 제자일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베뢰아는 교계의 지명도 있는 지도자가 마치 베뢰아의 영향을 힘입어서 무엇이 된양 나팔을 부는데 선전에 이용물이 되고 있다는 점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신실한 지명도 있는 주의 종들의 얼굴에 오점을 남기는 행위는 베뢰아의 이기적 욕심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흥선 목사의 경우 “김기동 목사는 기존의 교단적 주장과는 달리 다시 검증해 본 결과 이단 교리가 아닌 바른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고 했다.

 

김기동 목사를 검증한 이흥선 목사의 결과 그는 이단이 아니며 바른 신앙고백을 한다는 주장은 곧 자신이 한국 교회로 부터 이단의 규정을 함께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이단을 지지하는 대변자의 일반성은 이단의 사상을 별것이 아닌 것으로 용납하고 보아 넘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지한 결과이든지 아니면 그와 같은 동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로 : 귀신론 계열과 베뢰아 운동 < 반박문

 

「“교계는 서울 부활의 교회의 한만영 목사(그레리스 아카데미), 레마 복음선교회 이명범 목사, 한국 예루살렘교회 이초석 목사(땅끝 예수 전도단), 산혜원 부활의 교회 이태화 목사(드로아 아카데미)등이 베뢰아 계열로 정죄를 받아 왔다.”」

 

이단의 연구에서 그 계보는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단의 가라지는 그 종자를 낳기 때문이다. 이단의 발생을 보면 종교적 영향을 어디에서 받았느냐에 따라 그 행동을 그대로 하든지 아니면 유사 변종으로 이단의 운동을 다각적으로 실시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단의 사상과 운동이 어느 계열에 속했는지 잘 알아보고 처신을 함이 상식이다. 특히 교회 성장에 지나친 열의가 이단자 수하에서 제자 과정을 배우지 아니 했다 하여도 이단자의 방법을 여기 저기서 조금씩 받아 가지고 혼합 탕을 만들어 이를 전승하는 자 역시 이단의 규정을 벗어 날 수 없다.

한국에 이단들을 보자 안식일교 계열에 ‘여호와의 증인’, ‘엘리아 복음 선교회’ 박명호,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증인회가 그러하고 베뢰아는 위에 기록된 내용이며, 전도관, 통일교, 장막 성전에서 파생한 ‘무료성경신학원 신천지 교회’,‘새비등대중앙교회’, 시한부 종말론, 신비주의, 구원파, 새일중앙교회 계열, 박윤식 파, 박인선 파, 이교부 파 아가동산,등...이다.

성도에게 이단의 분별 교육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 부분에 무지하면 이단의 미혹에 빠지기가 아주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 보면 ‘이단에 대한 불감증’이 심화되어 있다. 그래서 교인 하나가 빠졌다고 해도 가면 가고, 말면 마는 안일주의이다. 그러다가 교회의 재정적 기둥이 되는 인물이 움직이면 그 때에 비로소 난리를 피운다. 과연 이래서 되는지 두손 들어 크게 각성할 일이다. 이단의 교육 프로그램이 개 교회에 결여되고 있음이 지적되는 것이며, 이는 노략질하는 이리에게 구멍을 열어 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여섯째로 :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증인 < 반박문

 

「“김기동 목사는 얼마 전 자신에게는 아직 제자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베뢰아 운동은 한 신앙 운동으로서 역사적으로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신본주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도를 전하고 사역의 원리로서 침례를 행하고 축사를 행하고 신유를 행하라는 운동이다. 베뢰아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의도를 전하고 침례, 축사, 신유를 행하여야 할 것이다.” 」

 

한국에 베뢰아 신학의 원조인 김기동 목사는 아직 제자가 없다고 하는데 기독 저널 발행인 이흥선 목사는 교계에 지명도 있는 자도자들이 그의 가르침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제자화 홍보에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차세대에 지도자로 불릴 만큼 성공적인 목회를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 했다.

베뢰아 운동이 작은 세월이 아니며 제자 과정 ○기생이 있는데 아직 까지 제자가 없다는 김기동 목사의 말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베뢰아의 하나님의 의도는 탈복음적 사상으로 경계하여야 한다. 그리고 베뢰아 사람이라면 침례 축사 신유를 행하여야 할 것이다가 아니라 예수의 증인된 성도라면 성령님의 은사를 따라 행하여지는 것이다.

축사를 하더라도 한국의 베뢰아 식은 복음이 아니다. 이 부분은 재론할 이유가 없다.

 

5. 반박 보도문 < ⑤ 베뢰아 운동은 신약 교회를 위한 신본주의 신앙 운동 (1997, 7, 27 일요일 제29호)

 

첫째로 : 하나님이 쓰시는 종을 변증해야 < 반박문

 

「“필자는 교계 분열 상황에서 일부 한국 교회의 신학자들이 자기 교단의 이득(?)을 지키고자 교권주의 목회자들의 횡포에 의해 정말 내키지 않게 (?) 이단 정죄 마당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이 여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신학자의 본분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일꾼들이 영혼들을 구원하고 성령의 후원하심으로 교회를 돌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 어찌 진리수호라는 미명하에 이단으로 정죄할 수 있는가? ”」

 

그러면 변증을 받아야 할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 과연 누구인가 ? 베뢰아 측에 김기동 목사를 비롯하여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 교계를 향한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들은 1996, 9, 28 일자 베뢰아 ‘주일신문’ ‘물두멍 근거’에 “베뢰아 운동을 향하여 이단이라 하는 것은 마귀의 앞잡이요” 한국 기독교를 “모두가 마귀에 수중에 있으니 우리만이라도 진정한 베뢰아인이 되어”라고 기성 교회를 오히려 이단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마귀의 집단임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베뢰아에 소속된 종들이 변증을 받으려면 복음으로 돌이킴이 유일한 길이다. 비록 기성 교회에 개혁의 요소가 있다 하여도 이를 기화로 이단자 규정을 받은 불법적 이단의 사상을 은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리 수호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이단의 정죄를 한다는 태도는 기독교를 진정으로 사랑을 한다면 삼가야 한다. 베뢰아 이단의 규정이 분파적 성격의 상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복음에 조명된 검증의 결과이다. 그런고로 그럴듯한 명분에 의하여 각 교단이 희생을 시킨 ‘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교회 근간에 이상한 기류가 있는데 그것은 이단의 규정을 받은 무리가 너도나도 우리가 왜 이단이냐 ? 식으로 ‘원천 무효화’ 소리로 교계를 향하여 높이고 있음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여하간에 문제의 해결은 이단의 규정을 받은 사상을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그냥 고수하고 원천 무효화시킨다 이것은 인류역사 종말의 때까지 뿐 아니라 성경이 존재하는 한 벗어날 수 없다. 이단의 규정은 그럴듯한 명분의 결과가 아니다. 성경의 기준에 의한 것이다.

 

둘째로 : 그래도 귀신을 쫓아야 < 반박문

 

「“필자가 이런 내용을 기사에 냈다고 하니까 동료 목사 한 분은 가뜩이나 귀신이 하는 말을 듣는다고 욕(?)을 먹는 판에 기사가 악용될까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 귀신을 좇아 내고 병을 고치는 것과 관련하여 베뢰아 운동은 많은 오해를 받아 왔다...진정 베뢰아 사람이라면...비록 욕을 좀 먹더라도(?) 귀신을 쫓는다.”」

 

귀신을 쫓는 축사는 성경에 근거한다.

기독인은 누구나 귀신 축사에 대한 성경적으로 순종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부인할 이유가 있는가 ? 문제는 베뢰아 식의 귀신 축사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베뢰아는 자신들의 축사와 신유로 많은 ‘오해’를 받아 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릇된 판단으로 잘못된 이해가 아니라 극히 정상적 성경 해석에 의한 것이다. 성령이 아닌 악령의 역사로 귀신을 축사하는 것은 당연히 기독교에서 추방이 되어야 한다. 성경대로 귀신 축사를 함에 욕을 먹는 일은 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경우로 욕을 먹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그래도 베뢰아 방법으로 귀신을 쫓아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고집에 불과하다. 성령님에 대한 신론이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잘 못된 베뢰아 사상에 귀신 축사가 거룩한 사역이라니 그것은 어불성설( 語不成說)이다.

 

셋째로 : 베뢰아 운동의 신학적 입장 < 반박문

 

「“누구라도 정당하게 성서적, 신학적, 현상학적으로 귀신론을 연구한다면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영적 존재임을 밝히는데 증거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에 베뢰아 귀신론을 재평가해야 한다”」

「“20여 목사와 관련 교회 및 신앙 운동들을 이단 혹은 사이비라 규정하는 중에 많은 불법을 저질러...이토록 잘 못된 이단 규정은 양식이 있는 신학자들의 재연구에 의해 이제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베뢰아 귀신론 재평가는 늘 말하지만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 신학을 버리는 것이다. 한상식 목사 역시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 존재라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음을 성서적 신학적 현상학적인 연구의 결과라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악한 자의 임함에 사실적 현상의 체험에 근거한 자의적 성경 해석으로 이를 체계화시킨 것이다. 문제는 현상학에 사실적 근거가 성경에 합당하냐 아니면 불법이냐에 유의하여야 한다.

‘악한 자’가 ‘주의 이름’으로 ‘양의 옷’을 입고 미혹을 한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당시에 애굽의 술사가 행한 현상에 동일한 표적을 보라 그러나 결국은 모세가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베뢰아 귀신론 신학은 비록 귀신이 나가고 신유를 행한다 하여도 성경적 모범이 아니므로 마본주의(魔本主義) 신학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20여 목사와 관련한 교회를 이단의 규정에서 해제해야 한다는 전체적인 주장이야말로 경솔하고 분수없는 행동이다. 한국에 각 교단이 규정한 이단이 전체가 오판이라는 것인가 ? 이미 신중한 연구로 규정된 집단이나 무리는 복음으로 재정립하는 일이 자신들이 행할 일이다. 신학자의 재 연구라니 오히려 자신이 고칠 생각은 추호의 여지도 보이지 아니하며 재연구로 이단의 사상에 귀일 시키려는 사고야말로 교묘한 속임수에 전략이다.

이단의 규정을 해지하라 하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서면 되는 것이다. 기성 교회를 마귀의 앞잡이라고 정죄를 하는 이단의 집단이 무엇이 그리 할 말이 많은가 ? 이단의 사상을 버리지 아니 하는한 그 무리를 풀어놓는 행위는 기독교 우리 안에 그들로 침투하여 노략질하는 최선의 전략에 빠지는 것이다. 오해가 없기를 기대한다.

 

넷째로 : 베뢰아 운동의 10가지 신학적 과제 < 반박문

 

「“ 베뢰아 운동, 특히 그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교계 일부의 목회자들이나 신학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이것이 주로 교권의 지배하에 있는 일부 목회자들의 편협한 이해에 기인한 것임을 밝혔다”」

 

베뢰아는 이단의 규정을 받은 내용을 먼저 전폭적으로 폐기하고 베뢰아 운동을 운운하기 바란다. 근본 바탕에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시무언 신학사상 연구 자료 수집과 출판’을 체계적으로 함이 기성 교회 갱신에 도움이 되리라는 착각은 망상에 불과하며, ‘세계화를 위한 번역과 출판’으로 신학 자료를 문서화하는 일 역시 이단의 신학 사상에 세계화를 촉진하는 것이다. 베뢰아는 ‘기독교 세계관 정립’으로 뉴에이즈 사상을 극복하는 신본주의 세계관을 정립을 한다는데 참으로 한심스럽다. 왜냐하면 베뢰아 신학 그 자체가 신본주의가 아니며 ‘뉴 에이즈’ 사상이나 다를 바가 없음이 그에 버금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서학 연구’‘하나님의 이름 연구’‘교회사 이해’‘신학의 분류’로 이론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는 신학이 되게 한다는데 어이 하든지 말이야 다 좋으나 이론과 실천의 조화라면 베뢰아 학설을 폐기하지 아니 하는한 베뢰아 의 조화일 뿐이며, ‘귀신론 연구’로 서구의 귀신론 보다 더 철저하고 실재적인 귀신론 정립에 기여한다면 보나마나 뻔한 것이다.

한상식 목사는 베뢰아 운동의 신학적 입장이 충분히 교계에 이해되지 못함이 편협한 일부 목회자에 기인한다는데 과연 말이 되는가 ? 그것은 베뢰아 측에 이해에 불과하며,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표현한 선전 이론에 불과한 것이다.

베뢰아 관련한 지도자의 경우 김기동 목사 그의 의도적 신학의 주체적 체계와 자신이 기성 교회에 있을 때에 가진 복음에 혼합된 정신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과 이해의 주장이 주체적 베뢰아 신학의 입장이 아닌 잡탕으로 신본주의 신앙의 운동을 지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뢰아 자신들은 바르게 하자는데 왜 교계는 이를 이해하지 못 하는지 답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베뢰아 운동을 지향하는 그들이 가진 이단의 신학 사상에 기인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결 론

 

◐ 베뢰아 측에 이단설은 세계 보편 교회의 신앙고백 실천한다 + 베뢰아 주장과 학설 <=> 성서적 이단이 아니다. 이같은 수리 문학 논법은 그 합리적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 정통 신앙고백(양의 옷/ 껍데기 / 겉) + 베뢰아 주장 학설( 노략질하는 이리 속성 / 알맹이 / 속) +< = > 양 + 이리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이다. ↔ 그러므로 기독교화 되어진 양의 너울을 쓴 이단이다.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베뢰아 사람은 성경과 예수님을 닮는 일에 모범을 보였으나, 한국에 베뢰아 운동은 성경 닮기 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모범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신앙고백을 하지 말고 주장과 학설도 성경에 합당해야 한다. 베뢰아가 이단의 규정을 면하는 길은 여러 번 말하지만 이단의 신학 사상과 그 학설을 버리고 성경의 기본적 교리를 믿음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를 버리지 못함은 양의 옷을 입은 노략질하는 이리인 증거이다. 왜 겉과 속이 다른가 ?

‘양’은 ‘양의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근본이 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리의 경우’는 노략질을 위하여 위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가장의 옷’이 바로 ‘기독교 기본 진리 체계’와 ‘신앙고백 전문’이다. 노략질하는 이리가 그 속성을 버리지 아니하고 정통성을 믿는다는 주장은 생명이 없는 ‘양의 가죽’에 불과하다.

초대 베뢰아 사람은 한국 베뢰아가 주장하는 이단 사상을 믿었다는 성경에 근거가 있는가 ? 눈을 크게 뜨고 사실이 그러한가 상고하여 보라 !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뢰아 운동은 마본주의 신앙이다.

이단의 규정을 받은 신학의 사상을 공식적으로 폐기한 선언이 없는 한 교계의 성도는 몇 마디 그럴싸한 신앙고백의 전문과 악령에 의한 사실적 현상학 감언이설에 속지 말 것을 당부하며, 베뢰아 측은 속히 복음으로 돌아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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