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진리수호

김성로 목사, '부활복음' 이단성 지적에 답하다

기이협의 조언과 같이 향후 성경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통해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겠습니다.

목회와진리수호 | 기사입력 2016/07/20 [20:58]

김성로 목사, '부활복음' 이단성 지적에 답하다

기이협의 조언과 같이 향후 성경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통해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겠습니다.
목회와진리수호 | 입력 : 2016/07/20 [20:58]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목사

최근 춘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의 부활복음에 관련한 지상 논쟁들이 많아 기독교이단대책협회에서 김성로 목사에게 부활복음과 관련한 공식 질의서를 지난 4월 4일 보냈고 이에 김성로 목사는 일주일이 지난 4월 11일 답변을 보내왔다. 가감없이 질의 및 답변에 대해 전문을 올리오니 독자 여러분이 판단하기 바란다. - 편집자 주 

먼저 귀한 사역을 하고 있는 기독교이단대책협회(기이협) 대표회장 백남선 목사님, 상임회장 박형택 목사님과 이단 연구가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며 본 교회와 본인을 위한 진심어린 제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기이협에서 보내온 제언에 대해 수용하며, 앞으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도록 표현에 신중함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1. 하늘 성소의 영원한 제사에 대한 입장

본인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 하늘 성소에서 드리신 단 한 번의 제사이며 십자가와 하늘 성소의 제사는 따로따로가 아니라 한 사건, 한 제사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드린 속죄제사가 온전한 제사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며, 십자가와 하늘성소에서 두 번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영원한 제사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부활 후에 하늘성소에 들어가 속죄 제사를 드린다.”는 표현에서 속죄와 구속에 대한 용어적인 혼동이 있었으며, “부활 후에 성소에 들어갔다.”는 내용도 부활에 대한 시간적인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합니다. 이로 인해 두 번 제사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기이협에서 제언한 대로 로마서 4장 25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십자가의 대속사건)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예수님의 부활사건)’는 말씀처럼 ‘주님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vicarious atonement)와 ‘부활하셔서 구속하심’(redemption)의 신학용어적인 개념을 구별하는 것과 하늘 성소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린 시점에 대해 다양한 신학적 의견들이 있지만, 기이협의 제언대로 십자가의 죽음 이후 곧 하늘 성소에서 속죄 제사를 드렸음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하늘 성소의 제사가 따로 따로가 아니라 한 사건, 한 제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믿습니다.

본인은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9장 22절 말씀 같이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없기에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부활이 전제된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와 부활은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크거나 중요하다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같이 어느 것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되는 복음의 핵심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2. ‘하나님의 피’ 용어사용에 대해서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피”라는 표현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전에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대한 견해를 먼저 밝히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이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하나님이 각각 독립된 위(位, person)로 존재한다. 따라서 성부는 결코 성자나 성령이 아니며, 성자는 결코 성부나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결코 성부나 성자가 아니나 삼위 하나님의 본질은 같고, 본질적으로 다른 위(位)보다 못하거나 낫거나 하지 않은 하나(一體, unity)이시라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과 기능은 다르나 각 위(位)는 동등하시다.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 4, 「예수님은 누구신가」, p.32)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다.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성부(聖父)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本質)이시며 인성(人性)에 있어서는 우리 사람과 동일한 본질이시다. 그분은 이 두 속성을 가졌으나 상치(相馳)되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참되게 연합하고 있는 한 인격체이다. 각 속성의 고유성들은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며 두 속성은 함께 구체적인 실체인 한 인격을 형성하며 두 인격으로 분할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을 사람으로 가장한 하나님이나 신적인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분은 사람이 된 하나님이다. (한마음 제자훈련 시리즈 4, 「예수님은 누구신가」, p.39)

‘하나님의 피’ ‘하나님의 죽음’ 이런 표현은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기초한 신앙적 고백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사람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희생과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피’ ‘하나님의 죽음’과 같은 표현은 영이신 하나님이 물리적인 피를 흘렸다거나 영원하신 하나님이 죽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또한 초대교회 당시 양태론자였던 사벨리우스와 같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주장하는 ‘성부수난설’을 의미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의 하나님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3. “사도행전을 건너 뛴 시대”에 대한 용어사용에 대해서

사도행전을 건너 뛴 시대라는 말을 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사도행전을 살펴보아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변화된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고 분명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밖에는 없었다. 이런 고민 가운데 나의 목회에서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사도행전을 건너뛰고 서신서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왜 사람이 변하지 않았는지, 왜 초대교회와 같은 생명력이 있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사도행전을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를 다녀도 예수가 주인이 아니고 여전히 자기가 주인(主人)이었다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훈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복음’에 있었다. 훈련과 복음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김성로 목사,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pp.15-16)

먼저 ‘사도행전을 건너뛴 시대’라는 것은 왜 사람이 변하지 않는지, 왜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태동이 되지 않는지에 대한 고민 가운데 얻은 목회적 깨달음입니다. 사도행전을 건너뛰었다는 것은 교회를 다녀도 예수가 주인이 아니고 여전히 자기가 주인(主人)이었다는 뜻이며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를 세운 원형의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뜻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기이협에서 말씀하신 것 같이 서신서에서 부활을 강조하고 현재 한국교회에서 부활을 강조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초대교회와 같은 교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결론에 대해서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생명력이 있는 교회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를 세운 원형의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에서 사도행전을 건너뛴 시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4. 그 밖에 성경인용에 대해서

요한복음 2장 22절의 1차적 의미는 기이협에서 제시한 내용에 동의합니다.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성전된 자기 육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그에 대해 기록된 구약의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본인이 요한복음 2장 22절을 말하는 이유는 부활 현현의 체험을 통해 구약성경을 바라보고 믿게 된 제자들과 같이, 현대를 사는 우리 또한 부활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을 믿어야 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도들과 같은 직접적인 부활의 목격이 아니라, 성경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3-4절의 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마귀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것이라는 기이협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본인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본교회 조차 복음의 내용 중 부활의 중요성이 십자가의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고자 했던 마귀의 훼방은 복음서와 서신서 곳곳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8:13-15, 행 4:1-2, 딤후 2:18, 고전 15:12). 그러한 관점에서 고린도후서 4장 3-4절 본문에서 설교적 적용점을 찾아 설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화(神化)사상이나 그리스도와 개인의 존재론적 연합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이협에서 제시하신대로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처럼 그리스도와 한 몸, 한 생명으로 연합된(존재론적 혹은 기계적 연합이 아닌 유기체적인 관계적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 즉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설교한 것입니다.

본인은 그동안 신학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설교자로, 또한 목회자로 살아왔습니다. 부족하지만 온 힘을 다해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자 했고, 또한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성경 본문의 1차적 해석을 바탕으로 그 본문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성도들에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박한 표현으로 인해 오해의 소지가 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이협의 조언과 같이 향후 성경 본문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를 통해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겠습니다.

5. 본인은 30여년 목회하면서 침례교 신학과 신앙에 기초한 목회를 하였다고 자부합니다. 혹자들이 말하는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친 적이 없고, 정통신학을 부정한 적도 전혀 없습니다. 본인이 부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 확증이 되면 십자가 사건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민일보에 기고한 칼럼처럼 “부활을 통해 십자가를 바라보자”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최근 본인을 안식교의 조사심판교리와 같다는 혹자들의 악의적이고 매도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이협에서 본인과 춘천 한마음교회를 향한 진심어린 제언에 감사를 드리며 추후 신학적인 자문을 받아서 용어적인 표현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4월 11일

김성로 목사